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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양 돋보기|돈키호테

컴퓨터 게임 속 돈키호테 종횡무진

21세기 전사들 적군과 대결 저만의 성 구축 … 이성의 시대 발칙한 상상과 모험 여전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컴퓨터 게임 속 돈키호테 종횡무진

컴퓨터 게임 속 돈키호테 종횡무진

종자 산초와 함께 모험의 길을 떠나는 돈키호테.

에스파냐 시골의 향사 아론소 기하노는 밤낮으로 기사도 이야기를 탐독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자기 스스로 중세기의 편력 기사가 되어 세상의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당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돈키호테 데 라 만차’라고 자칭하고, 갑옷을 입고 로시난테라 이름 지은 앙상한 말을 타고 편력의 길에 오른다. 돈키호테가 염원하는 여성은 실재하고 있지만, 거의가 그의 광기와 망상으로 그린 여성이므로 이 소설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근처에 사는 농부 산초 판자를 종자로 거느린다. 현실과 동떨어진 고매한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는 순박한 농사꾼으로 우직하고 욕심꾸러기이며 애교가 있고 충실한 종자 산초 판자와는 지극히 대조적인 짝을 이루어, 그의 기사도 정신의 광기와 몽상은 이 두 사람이 가는 곳마다 현실세계와 충돌하여 우스꽝스러우나 주인공들에게는 비통한 실패와 패배를 맛보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패배를 겪어도 그의 용기와 고귀한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조롱과 연민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오는 작품 설명이다. 에스파냐의 문호 세르반테스의 작품으로, 원제는 ‘재미 발랄한 향사 돈키호테 데 라 만차’이며 전편은 1605년에, 후편은 그보다 10년 뒤인 1615년에 출판되었다고 한다. 이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세르반테스는 “당시 항간에 풍미하던 기사도 이야기의 권위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어쩌면 4000년 전에 씌어진 이 책이 요즘 인터넷에 유행하는 패러디 문학의 효시일지도 모르겠다.

세르반테스가 밝힌 집필의 동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중세에서 발생하여 르네상스 시대까지 유행했던 기사 문학의 로맨스에 매료당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르반테스는 이 소설로써 사정없이 자기의 동시대인들을 비웃는다. 때는 마침 17세기 초반, 흔히 “이성의 시대”라 부르는 고전주의 시대가 막을 올렸던 시기다. 기사 문학을 비웃는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사고의 유형, 우리가 ‘이성’이라 부르는 새로운 정신을 대표한다.



사전은 이 작품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감흥이 솟는 대로 일정한 계획도 없이 써나가는 동안, 처음 의도한 바를 잊고 주인공 돈키호테와 종자인 산초 판자의 성격을 창조한다는 새로운 주제에 열중하여 드디어 인생 전체를 포괄하는 대작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독자는 종종 가짜 기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이렇게 풍자의 주체가 풍자의 대상과 동화되면서 독자는 돈키호테에게 조롱과 연민의 이중 감정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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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발레단의 ‘돈키호테’ 중 한 장면.

세르반테스가 대변한 새로운 시대정신은 몇십 년 후 데카르트에 의해 ‘합리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적 표현을 얻게 된다. 데카르트의 ‘성찰’(1641)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의 내부에 있는 상상력은 (…) 내 정신의 본질에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한마디로 이성적인 존재는 가능한 한 상상력을 멀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으로 보아 데카르트 때만 해도 사람들은 아직 차가운 이성보다는 포근한 상상을 즐겼던 모양이다.

전설 속의 ‘용’을 생각해보자. 용은 뱀의 몸통에, 사슴의 뿔을 달고, 새의 다리를 가졌다. 이런 동물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그려 모아 만들어낸 허구의 존재일 뿐이다. 상상력은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인 양 표상한다. 그로써 인간의 판단을 오류에 빠뜨린다. 데카르트가 “상상력은 내 정신의 본질에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어떤가? 그는 상상력의 마법에 사로잡혀 있다. 현실과 허구 사이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는 착란 속에서, 가축 떼는 군대가 되고, 하녀는 귀부인이 되고, 여인숙은 영주의 성이 된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읽은 기사 문학을 곧 현실로 착각한다. 미셸 푸코의 말대로 그는 “책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계를 읽는다.” 그의 모험 자체가 실은 하나의 허구. 온몸으로 허구를 쓰면서 방랑을 하는 것이다.

말과 사물

우리의 눈에 돈키호테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그는 정상인과 달리 말과 사물을 구별하지 못하는 예외적 존재, 즉 ‘광인’일 뿐이다. 하지만 세르반테스와 데카르트의 시대가 등장하기 이전, 그러니까 르네상스 시대에만 해도 돈키호테는 결코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키호테처럼 상상력의 마법에 사로잡혀 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인물일 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유는 17세기의 합리주의 정신과는 달랐다. 가령 “사슴의 머리에는 나무가 자란다”는 표현이 있다 하자. 여기서 ‘나무’는 그저 ‘뿔’을 가리키는 문학적 은유일 뿐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인들은 정말로 사슴의 머리에는 나무가 자란다고 믿었다. 사슴의 뿔을 실제로 식물성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남자의 턱에 난 수염을 르네상스인들은 인간의 몸에서 자라나는 풀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유사성은 곧 동일성의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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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청소년들. 네모난 모니터 속에서 전사의 명예를 걸고 싸우고 있다.

가축 떼를 군대로 보고, 풍차를 거인으로 알고, 하녀를 귀부인으로 대접하고, 여인숙을 성으로 간주하는 돈키호테의 착란. 그것은 바로 이런 유비(類比·서로 다른 사물의 상호 간에 대응적으로 존재하는 유사성 또는 동일성을 이룸)적 사고방식의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르네상스 때만 해도 돈키호테는 결코 별종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불행은 너무나 늦게까지 그렇게 살다가 합리주의 시대에 냉혹한 이성의 눈에 띄어 비웃음을 당했다는 데에 있다.

유사성과 동일성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라켈수스. 이 르네상스의 의학자는 식물의 외양에서 약초의 성분을 추론하곤 했다. 가령 인간의 간을 닮은 뿌리는 간장병에 효과가 있고, 인간의 콩팥을 닮은 뿌리는 신장병에 특효가 있다는 것이다. 식물의 외양이 신체의 기관을 닮았다고 실제로 그 기관에 좋은 약성분이 들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사성을 곧 동일성의 증거로 보았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우리는 외양이 비슷하다고 고래를 물고기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외려 그것과 별로 안 닮은 개나 소나 말과 함께 포유류로 분류한다. 유사하다고 곧 동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게 바로 근대의 합리주의 이후에 등장한 ‘분별력’이라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인간들이 유사성의 선을 따라 자유로이 상상력을 펼쳤다면, 근대의 합리적 인간들은 그런 비약을 자제하고 ‘동일성과 차이’에 따라 사물들을 냉정하게 분류하려 한다.

태양의 주위를 도는 일곱 개의 행성과 우리 얼굴에 난 일곱 개의 구멍. 이 둘의 유사성에서 르네상스인들은 매크로 코스모스와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동일성을 가정했다. 17세기에 들어와 이 유비적 사고방식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적 문학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는 동일성과 차이라는 잔혹한 이성이 기호와 유사성을 쉴 새 없이 비웃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네 개의 에피스테메

미셸 푸코에 따르면 서구의 사고에는 크게 네 가지 패러다임(에피스테메)이 있었다. (1) 유사성의 선을 따라 자유로이 ‘뿔=나무’ ‘수염=풀’ ‘얼굴=우주’라 상상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유비적 사유방식 (2) 동일성과 차이에 따라 사물을 공간적으로 분류하던 17세기 고전주의 시대의 냉철한 이성주의 (3) 사태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악하는 18~19세기의 역사주의 (4) 사안에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20세기의 구조주의가 그것이다.

푸코는 ‘말과 사물’(1966)의 한 장을 ‘돈키호테’의 분석에 할애한다. 이 작품이 처음에서 두 번째, 즉 르네상스적 에피스테메에서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로 이행하는 분수령에 놓여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에게 보내는 우리의 조롱은 17세기 이성의 시대가 그 전의 몽상의 시대에 보내는 야유라 할 수 있다. 이성의 시대에 계속 돈키호테처럼 살려는 자, ‘광인’ 취급을 받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돈키호테도 스스로 자신의 몽상이 한갓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장면에서 돈키호테는 “이제 저의 마법은 무너졌습니다”라고 말하던 ‘템페스트’의 프로스페로를 닮았다.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돈키호테’와 ‘템페스트’. 돈키호테는 몽상에서 깨어나고, 프로스페로는 마법에서 벗어난다. 몽상과 마법의 시대는 가고, 이제 냉철한 각성의 시대, 냉혹한 이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디지털 돈키호테

그런데 그 광인의 시대착오가 우리를 매혹시킨다. 왜 그럴까? 냉혹한 이성의 시대가 내다버린 사랑과 헌신, 명예와 자존, 희생과 봉사의 가치에 대한 낭만적 동경 때문에?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돈키호테’를 그저 조롱만 할 수 없는 사정이 새로이 생긴 것 같다. 디지털 혁명으로 허구와 실재의 구별이 점점 더 흐려지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게임의 몽상 속으로 들어가 돈키호테와 같은 모험을 즐기고 있는가.

지루한 산문의 시대에도 디지털 전사들은 네모난 모니터 속에 들어가 전사의 명예를 걸고 적군과 대결하고, 거인을 물리치며, 저만의 성을 구축하며 살아간다. 돈키호테가 온몸으로 기사 문학을 살았던 것처럼, 사이버 전사들 역시 온몸으로 프로그램을 산다. 이들 역시 컴퓨터를 끄고 현실로 돌아오면서, 죽어가는 돈키호테처럼 자신의 모험이 한갓 망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참회할까?



주간동아 2005.11.01 508호 (p72~74)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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