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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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

  •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입력2004-12-14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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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br>\'예수 탄생\'의 부분그림

    예수는 참 파란 많은 존재였다. 신성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난 것부터 예사롭지 않지만, 그의 삶은 고비마다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한다. 예수는 잘 알려진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았다. 보리수나무 아래 느긋하게 누워 입멸한 붓다에 비하면 해골산에서의 십자가 책형은 얼마나 으스스한가. 그것도 모자라 병사들은 식초를 적신 해면을 그의 입술에 바르고 창날로 옆구리를 후볐다니까 인간의 잔혹 취미는 정말 끝이 없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왕자 신분을 타고나 노인과 병자와 상여를 절대 못 보게 행복한 격리 생활을 했던 붓다에 비교하면, 냄새나는 외양간 여물통을 요람으로 삼았다는 예수의 탄생은 첫 단추부터 고단했던 그의 삶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래서 화가와 조각가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만큼은 어여쁘게 그려내려고 무척이나 애썼다. 그러나 가혹한 절망과 운명의 구렁텅이 속에서 새로운 구원의 희망을 역설하는 반어법의 수사학을 선호하는 예술가들도 적지 않았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바로 그랬다. 그는 르네상스 이탈리아 화가다. 그의 ‘예수 탄생’은 바람이 씽씽 부는 겨울철 빈 들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오른쪽에 멀찌감치 도시가 보인다. 베들레헴이다. 그림 왼쪽의 메마른 산악은 이곳에 오기까지 고된 여정을 말한다. 그림 복판에 자리잡은 외양간은 뒷벽만 겨우 남았다. 엔간한 바람에는 지붕이 들썩거릴 판이다. 뗏장이 꺼멓게 눌어붙은 맨땅에 아기가 누웠다. 태어난 날이 일요일 자정이었다니까 첫날밤은 가까스로 넘긴 셈이다.

    이건 죄다 아버지 요셉 탓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구조사를 받으려고 베들레헴에 갔는데, 배가 부른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간 게 화근이었다. 자기는 다윗의 직계니까 베들레헴에 간다지만, 오늘 내일 하는 만삭의 임산부를 여행길에 끌고 간 건 조금 무모한 결정이 아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마리아는 길에서 해산하고 만다.

    예수 탄생에 대한 문헌 기록은 신기할 정도로 빈약하다. 혹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약성서의 마르코와 요한 복음서는 이 대목을 아예 빼놓았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딱 한 줄뿐이다. “마리아가 아기를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루가가 그나마 몇 줄 보탰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 그리고는 그만이다. 여기서 말구유에 해당하는 라틴어 praesaepium은 ‘말-’을 빼고 ‘구유’나 ‘여물통’으로 옮기는 게 낫다. 소, 나귀, 양, 염소도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때 사람들 인심이 좀 너무하지 않았나 싶다.



    13세기 기독 성자전인 ‘황금전설’에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이보다는 자세하게 실려 있다. 요셉 일가는 처음부터 베들레헴에서 방을 잡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쪽방 하나 잡을 여유도 없을 만큼 빈털터리였으니까. 하는 수 없이 골목길을 기웃대다 집들 처마가 서로 맞붙은 빈터에 자리를 잡았다. ‘히스토리아 스콜라스티카’를 보면 그곳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데다 장사치들이 소나 나귀를 부려두는 곳이었다고 한다. 뭇 시선이 번다하고 위생상태도 불결해 아기 낳기에는 최악의 장소였다.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

    조토 디 본도네 '예수 탄생'

    그러나 마리아는 이런 곳에서 몸을 푼다. ‘황금전설’을 보면 마리아는 먼저 구유에다 밀짚을 깔고 그 위에 포대기를 덮었다. 침대 쿠션 겸 일종의 방한 장치인데, 한겨울 밤에 갓 태어난 아기가 얼어죽지 않도록 나름대로 준비한 셈이다. 그리고 그 위에 아기를 눕혔다. 마침 그곳에 매어 있던 소와 나귀는 기특하게도 밀짚을 먹어치우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가 깔고 누웠던 밀짚은 훗날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고고학 원정을 갔다가 찾아내 로마에 가지고 와서 지금은 바티칸의 보물로 분류되어 있다.

    사실 예수 탄생 장면에 마리아가 처음부터 낀 것은 아니다.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곧 ‘신을 낳은 자’라는 칭호로 부르기로 한 다음부터 비로소 목에 힘을 주게 되었다. 마리아는 두 손을 모으고 아기를 응시한다. 그런데 앉은 자세가 이상하다. 무릎을 땅바닥에 붙이고 허벅지부터 허리까지 곧게 세운 자세로 꿇어앉았다. 아기를 낳느라 죽을 기운을 다 썼을 텐데 산모가 이렇게 허리에 부담 가는 자세로 앉아 있는 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이 자세는 스웨덴의 성녀 비르기타(1303~1373)가 환영에서 본 광경을 재현한 것이다. 비르기타는 어릴 적부터 신기루 같은 환영과 더불어 살았는데, 나중에 과부가 되고 나서 시토 수녀회에 들어가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기록을 남겼다. 1391년 바티칸이 비르기타를 성녀로 선포하면서 환영 기록들도 신빙성을 얻게 된다. 화가들은 기다렸다는 듯 성녀가 보았다는 장면을 그려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끈 것이 바로 아기예수의 탄생 대목이다. 비르기타는 마리아의 출산 장면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 상상했던 것처럼 누워서 낳은 게 아니라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운 자세로 앉아서 낳았다는 것이다. 이 자세는 처음에 알프스 북부 지역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다 15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도 널리 퍼졌다. 미술의 다른 표현 가능성에 목말랐던 델라 프란체스카도 마리아의 새로운 유형을 얼른 받아들였다.

    마리아는 약간 지친 표정이다. 그러나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파란 겉옷을 크게 펼쳐 아기의 배냇요로 삼았다. 성모의 가슴께부터 아랫배 밑으로 길게 흘러내린 옷주름과 겉옷을 길게 늘여서 편 모양은 출산 과정과 모자의 운명을 돌려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 요셉은 나귀 안장에 걸터앉았다. 갓 약혼한 사람치고는 너무 늙었다. 이 당시 화가들은 성가족의 초상을 그릴 때 요셉을 늘 한물간 노인으로 그렸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라고만 씌어 있지만, 미술 전통에서는 요셉을 영구 동침불능 상태로 재현하는 관례가 굳어져버렸다.

    오른쪽 뒤에 목자들이 지팡이를 들고 섰다. 목자 하나가 팔을 들어 하늘을 가리킨다. ‘임마누엘을 기다리는 구약시대부터의 오랜 염원’을 의미한다. 지붕 위의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다.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

    트레차코프 이콘 '예수 탄생'



    마리아 뒤쪽으로 소와 나귀가 보인다.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동물들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예언자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면서 소와 나귀를 이방인에 빗대었다고 해서 예수 탄생 장면마다 우정출연하게 되었다. (1:2~3)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만들어준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

    아기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수태할 때도 그랬지만 해산 뒤에도 여전히 처녀의 몸이었다고 한다. 동정녀 수태를 예언한 이사야 예언서(7:14)까지 들추지 않더라도, 바르톨로메오가 쓴 ‘콤필라티오’ 중 예수의 어린 시절에 그 부분이 잘 나와 있다. 동방교회에서 특히 주목했던 대목이다. 마리아가 산통을 호소하자 요셉은 그곳 관습에 따라 두 여인을 불러온다. 산파의 이름은 제벨과 살로메였다. 아기를 받던 제벨이 문득 놀라 소리쳤다. “에그머니, 아기를 낳았는데도 숫처녀일세!” 그 말이 믿을 수 없던 살로메는 제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손에 맥이 풀리면서 갑자기 오그라붙는 게 아닌가! 그때 천사가 나타나 살로메에게 아기를 만지게 하자 살로메의 손에 생기가 돌면서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무염시태와 동정녀 출산 사건을 로마의 역사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로마인들이 전쟁이 끝난 것을 기념해 평화의 신전을 세웠을 때였다. 사원에 로물루스의 기둥을 모시고 아폴론 신탁에 평화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문의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동정녀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신탁을 전해들은 로마인들은 환호했다. 동정녀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노릇이니 평화는 영원하리라 믿고 신전에 ‘영원한 평화의 신전’이라는 현판을 써서 달았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그날 밤 신전은 무너지고 말았다. 현재 산타마리아 누오바 교회가 서 있는 옛터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한다.

    델라 프란체스카의 ‘예수 탄생’에는 세상 만물이 고루 등장한다.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는 외양간의 돌담, 밀짚, 소와 나귀, 성가족, 천사들은 제각기 광물,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초월적 존재를 대표한다. 여기서 만물 경배론을 읽을 수 있다. ‘황금전설’은 이렇게 설명한다.

    “돌은 단순한 존재로서 예수를 경배한다. 식물은 그들의 존재와 생명의 기운을 가지고 경배한다. 동물은 존재와 생명에다 감각으로써 경배한다. 인간은 거기에 지적 인식의 능력을 더해 경배한다. 그리고 천사는 이 모든 것에 신적인 지혜를 보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증언하고 경배한다.”

    그러나 한겨울 밤 낯선 곳의 외양간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의 운명은 얼마나 스산한가. 그리고 가여운가.

    천사들이 입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가 겨울 바람을 잠재운다. 이들은 맨발이다. 요셉도 맨발이다. 소와 나귀도 맨발이다. 구유도 밀짚도 포대기도 없다. 이것은 벌거숭이 아기에 대한 작은 예의일까? 또는 예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곳이 성스러운 영토로 바뀌었다는 선언일까? 루가의 복음서는 천사들이 불렀던 찬양을 전한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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