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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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 “내 이름을 불러줘”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4-12-01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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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시기’ … “내 이름을 불러줘”
    금요일 저녁 대학로 컬트홀. 소극장이라곤 하지만 객석이 250석이나 되는 넓은 극장 안이 거의 들어차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연극이 소개되기 전 연극 ‘레이디 멕베스’와 영화 ‘꽃섬’의 주연으로 얼굴이 알려진 연극배우 서주희씨가 큰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나타났다. 배우가 화장도, 분장도 없이 무대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저는 오늘 포장되지 않고, 숨기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맨얼굴에 맨발로 무대에 섰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하는 이유는 그 말이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불안과 어색함, 경멸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보지! 세상에, 내가 말했네요. 보지, 어때요? 아주 충격적인 단어죠?” 객석엔 잠시 무안한 듯한 웃음과 술렁임이 일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말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밀이 됩니다. 비밀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두려움과 잘못된 신화가 되기 쉽습니다.”

    자기 몸의 한 부분인데도 어쩌면 많은 여성들이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이 없을 이 단어는 그 후에도 100번이 넘게 그녀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러나 처음에 느낀 불편함과 어색함은 극의 진행에 따라 편안하고 익숙하게 변해갔다. 극 중간에 게스트를 불러 인터뷰하는 코너가 있었다.

    오늘 게스트는 교수님(조선대 국문과 강옥니 교수)이었다. 서씨가 물었다. “첫 생리에 대한 기억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내가 무슨 병에라도 걸린 줄 알았죠. 너무 무서웠어요. 엄마는 은밀하게 이런저런 지도(?)를 해주셨고 아빠는 끝내 모른 척하셨어요.” “당신의 보지가 말을 한다면, 뭐라고 할까요?” “아마, 그동안 힘들었던 얘기 다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내 이름을 불러줘’ ‘날 인정해 줘’ ‘벗어나고 싶어’ 등등…” 객석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거시기’ … “내 이름을 불러줘”
    연극이 끝났을 때 배우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관객들 역시 2시간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다들 외투를 벗어든 채였다. 이날 단체로 연극을 관람한 조선대 학생들은 연극이 끝나고 무대에 오른 배우와 연출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무대의 감동을 연장하고 싶어했다. 관객과의 대화까지 끝나고 배우 서주희씨와 연출가 이지나씨, 게스트로 무대에도 올랐던 배우 박은숙씨를 함께 만났다.

    서주희:공연을 본 여성 관객들은 다음엔 남자친구, 남편과 함께 오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해요. 어떤 사람은 고등학교에 와서 공연을 했으면 좋겠다고도 하고. 이만큼 좋은 청소년 성교육도 없을 것 같아요.

    이지나:상처 입고 왜곡당한 여성 성기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남자들은 괜히 찔리는 느낌을 받나봐요. 그런데 신음소리 장면(이런저런 신음소리를 모아 코믹하게 연기하는)만 되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려요. 그게 제일 재미있나 봐요.

    박은숙:연기자다 보니, 몸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었지만 연극을 보고 난 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어요. 연극 속 워크숍 장면에 ‘손거울로 자신의 성기 살펴보기’ 있잖아요? 그것도 처음 해봤어요.(웃음)

    이:영국에 있을 때, 이 연극을 처음 봤어요. 제목에서 내용까지 엄청난 충격이었죠. 번역하면서 ‘보지의 독백’이라는 우리 제목을 붙였지만 내놓고 말할 순 없었어요. 극장 매표소에서 “보지의 독백 2장 주세요”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외국 관객들은 ‘버자이너’라고 하면 까르르 웃음부터 터뜨리지만 우리 관객들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긴장하는 표정이 되죠.

    서:연습할 때부터 하루에도 수백번 그 단어를 발음해야 했는데, 처음엔 저도 힘들었어요.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도 되고…. 음란어도 아니고 그저 고유명사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저 웃음으로 때우거나 ‘아래’ ‘거기’ ‘거시기’ ‘잠지’ 같은 애매한 말을 갖다 붙이죠.

    이:이 작품은 성기와 섹스에 얽힌 여성들의 아픈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치유하는 연극입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여성의 성에 대한 과거의 부정적인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어요. 그것은 미래를 향한, 몸에 기반을 둔 새로운 행동방식,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박:연극을 보면서 많이 웃게 되는데, 한편으론 굉장히 슬퍼요.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이 많아요. 전쟁에서의 강간, 유아 강간에 대한 얘기, 평생 섹스 한 번 못해본 할머니 얘기,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경험한 주부 얘기에선 저도 가슴이 찡해져요.

    이:‘이러다가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무미건조하게 늙어가는 건 아닐까’라는 대사를 쓰면서 펑펑 울었어요. 꼭 내 얘기 같았거든요. 나 같은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연출을 결심했어요.

    서:한국 여성들은 성의 전환기에 서 있다고 봐요. 지금까지 배워온 도덕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거죠. ‘결혼 안 한 딸이 남자친구와 여행을 간다고 하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오늘밤 남편에게 먼저 섹스하자고 말해도 되는 걸까?’ 이런 건 누구나 하는 고민일 거예요.

    박:20대라고 다르진 않아요. 우리에게도 성은 아직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에요. 중요한 건 확고한 자기 의지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죠. 연극의 메시지 역시 그런 거죠?

    서:나야말로 연극하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우리 386세대는 배워온 도덕관념에 갇혀 성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닫혀 있었어요. 우린 결혼 안 하면 섹스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요즘은 가끔 충동을 느껴요. 너무 바빠 아직 실행에는 못 옮기고 있지만요.(웃음) 좀 자유로워진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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