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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어느 ‘운동권 교수’의 독백

어느 ‘운동권 교수’의 독백

어느 ‘운동권 교수’의 독백
명색이 정치학 교수지만, 나는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정치권 근처를 기웃거려 본 적도 없다. 글자 그대로 백면서생(白面書生)인 셈인데, 이런 삶에 자족하며 살아왔다.

그런 내가 어느 순간 ‘운동권 교수’로 바뀌었다. 학교에 문제가 생겼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일이라 조금씩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꽤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가까운 후배 교수 한 사람이 “학교 다닐 때 데모라고는 별로 해보지도 않은 양반이 웬 운동권?” 하며 야유 겸 격려를 보내는데, 듣기가 싫지는 않다.

사실 연구실과 강의실만 지키겠다고 스스로 다짐은 하지만 시민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를 둘러싼 세상일에 무관심할 수 없는 일이다. 부조리가 넘쳐나는 현실을 외면하며 책만 읽고 지낸다는 것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사회에서 진 빚이 얼마나 큰가. 딴 것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직접 몸담은 이 작은 공간에 대해서만은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으로 주위 동료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거나 성명서를 쓰곤 한다.

그러나 벌써 6개월째‘투쟁’이라고 해오다 보니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니다. 먼저 생활의 리듬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공부가 여간 지장을 받는 것이 아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선배 교수들이 충고한 대로 ‘그냥 모른 척하며 내 할 일만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 따져보니 내가 결코 손해보는 장사만 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잃는 것 못지않게 얻는 것도 꽤 있다. 아니 훨씬 더 많다. 만일 미미하지만 내가 힘을 보태 우리 학교가, 나아가 우리 사회가 좀더 민주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삶의 터전으로 일보 전진할 수 있다면, 이것 이상 더 큰 소득은 없을 것이다.

학문적으로도 소중한 것을 얻었다. 대학이라는 조그만 공동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생각과 생각의 충돌, 이해관계의 복잡한 이합집산(離合集散)은 사회과학적 분석과 관찰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 삶과 정치의 본질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이를테면 어떤 사안에 대해 교수의 80% 이상이 자기 이름을 걸고 서명한다. 날마다 침묵시위를 한다. 철야 항의농성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단식(斷食)을 하면서까지 의지를 표명하고자 한다.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은 모두 동원해 주장한다. 그래도 세상은 꿈적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얼마나 통속적이고 권력지향적인지 놀라울 정도다. 양심과 이성에 호소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연목구어(緣木求魚)격이다. 같이 벌거벗고 싸우지 않는 한 그들은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길은 빤히 보이지만 그 길로는 갈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절로 생각난다. 그는 현실에 직접 뛰어들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청년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큰정치’를 실천에 옮기다가 독배를 들고 말았다. 소크라테스의 흉중(胸中)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부가 된다.

그뿐이 아니다. 세상이 그런 대로 아직은 살 만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큰 기쁨이다. ‘선한 이웃’을 새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보신(保身)과 타산(打算)에 잽싼 사람 때문에 적지 않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옳은 길이라 생각하면 앞뒤 재지 않고 우직하게 걸어가는 교수들이 이렇게 많은지 예전에는 몰랐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가장 큰 소득은 교수에게는 역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쉽고 또 재미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절감한 것이다. 책을 가까이 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머리에 먼지가 쌓이는 것 같다. 초조감이 엄습하는데, 공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는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운동권 교수’에서 다시 원래의 백면서생으로 돌아갈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주간동아 2001.08.23 298호 (p96~96)

  • < 서 병 훈 / 숭실대 교수·정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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