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8

2001.06.14

총성 없는 전쟁 “A급 정보를 찾아라”

세계 각국 경제·산업·기술 등 정보 수집 혈안… 국정원도 年 수만 건 챙겨

  • < 김 당 기자 > dangk@donga.com

    입력2005-02-02 13: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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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성 없는 전쟁 “A급 정보를 찾아라”
    냉전의 붕괴와 더불어 90년대부터 시작된 세계화의 흐름은 한국의 국가 정보기관에도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부여했다. 세계화 시대의 특징은 세계와 지역 그리고 북한과 대내 문제를 동시에 연계해 봐야 하는 과제를 정보기관에 안겨주었다. 이를 계기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해외 경제`-`산업 정보 및 과학-기술정보 수집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91년부터 시작된 경제·과학분야 석·박사 특별채용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경제전의 정보목표인 ‘해외 경제·산업·기술 정보’ 수집은 이제 국가정보기관 본연의 기본 임무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한국 같은 자원 빈국은 해외정보 수집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국정원은 그동안 우방국에서의 이런 활동을 대개 ‘대북 첩보 수집’이라는 핑계로 위장해 왔다. 경제보다 군사적 안보가 우위인 시절에는 우방국 정보기관도 그런 핑계를 눈감아주었다. 그러나 냉전이 무너진 이후 세계가 치열한 경제정보전을 치르는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다. 실제 한국은 현재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이른바 ‘산업스파이 국가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현재 전 세계 100여 개 국가의 정치·경제·군사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있다. 또 250개가 넘는 국정원의 해외 정보목표 중에서 경제·과학 정보 목표는 40개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년에 수집되는 수만 건의 해외정보 자료 중에서 경제·과학 정보는 2%를 넘지 못하는데다 이마저 A·B급은 아예 없고 90% 이상이 D급이고 1년에 30여 건만 C급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결국 국정원이 100여 개 국가의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모두 수집하였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같은 셈이다. 국정원의 ‘백화점식 정보목표’에 의한 정보활동이 안고 있는 취약성이다.

    총성 없는 전쟁 “A급 정보를 찾아라”
    이처럼 국정원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이는 해외 정보자산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북한이라는 존재가 갖는 안보위협에 있다. 정치·군사 정보 가치의 감소와 경제·과학 정보 가치의 증대라는 정보환경의 변화에도 국가 정보기관의 ‘메인 롤’(main role)은 대북 정보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이 국정원의 고정관념이다. 이런 이유로 국정원은 우리 나라가 놓인 안보적 특수환경과 정보환경의 변화를 감안해 정보역량을 적절히 배분하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첩보 사상 가장 어려운 상대’(미국 CIA의 표현)라는 북한을 체계적으로 들여다보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뿐이라는 자긍심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의 대외적인 위상은 국력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보기관의 활동영역은 크게 정보수집(Collection), 분석(Analysis), 공작(Covert Action;Clandestine Operation), 방첩(Counter-intelligence)의 네 분야로 나뉜다. 우리 나라 국가 정보기관의 경우 이 네 가지 활동영역의 정보역량이 집중된 분야가 바로 대북정보 분야이다. 우리는 흔히 대북정보라고 간략히 부르지만 이 안에는 정보수집뿐만 아니라 분석·공작·방첩 활동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인류 첩보 사상 가장 어려운 상대로 인식돼 왔다. 따라서 국정원의 정보활동 대상에서 북한보다 우선 순위를 갖는 존재는 예나 지금이나 없다. 해외 정보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의 해외 정보활동은 대북 정보자산을 축적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이를테면 국정원의 ‘해파’(해외파견) 요원들은 주재국의 정세 파악과 주재국 정보기관과의 정보협력이라는 기본적인 임무말고도 주재국의 북한 ‘해파’ 요원을 감시하고, 주재국과 북한의 관계를 점검하며 이를 활용해 북한을 들여다볼 요원을 파견하거나 국내에 우회 침투하는 스파이(간첩) 활동에 대한 방첩 임무 등을 맡아야 한다. 이밖에 대통령이나 VIP가 주재국을 방문하면 경호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는 국정원이 다른 나라의 국가 정보기관보다 여전히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국정원의 ‘해파’ 요원이 ‘슈퍼맨’이 아닌 다음에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일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정보수집 환경의 변화에 맞춰 정보기관의 정보수집과 관련한 역할과 기능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대북정보만 하더라도 과거와 달리 김대중 정부의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북한과의 ‘접촉면’이 확대되면서 정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북한 또한 심각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한때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무역일꾼 등 자국인에 대한 소환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경제난 극복에 나서면서 많은 ‘외화벌이 일꾼’들을 내보내고 있다. 자연히 남한의 많은 기업인·민간단체·언론 등과 빈번히 접촉하고 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소중한 ‘정보 수집선’인 것이다. 즉 과거처럼 은밀한 첩보수집활동을 하는 국가 정보기관만이 북한측과 ‘접촉선’이나 ‘정보 수집선’을 유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으며 또 대북정보를 독점하던 시대도 지났다.

    따라서 국정원은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생성되는 대북정보를 조직화하는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국정원이 수집하는 경제정보, 과학`-`기술정보 가운데는 개별 기업에게 유용한 정보가 있을 수 있고, 또 개별기업들이 수집하는 정보 중에는 해당 기업에는 필요치 않지만 국가적으로 유용한 정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국가 정보기관은 비록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개별 기업과 단체 그리고 언론 등이 소장·사장시키는 정보를 조직적으로 엮어내 체계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대북정보 부문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정보자산을 조직화·체계화했을 때 국정원은 그동안의 북한 일변도에서 눈길을 돌려 정보역량을 적절히 배분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그럴 때 국정원은 비로소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가치 있는 해외정보’ 수집과 대 테러, 국제범죄, 산업기밀 보호관리 등에도 힘을 기울일 수 있다.

    마약의 확산과 국제적 테러의 증대 그리고 ‘총성 없는 경제전’에 대처하는 국가정보기관의 역할은 한층 더 복잡해지고 임무의 효율적 수행도 훨씬 더 어려워진다. 갈수록 세계는 넓고 정보기관이 할 일은 많아진 것이다. 이같은 새로운 위협과 역할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국내외 정보 수집 업무의 성격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국정원의 현재 위상은 “과거에 비해 정보환경이 달라졌고 국정원의 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떨어졌는데 임무는 그대로다”(중간간부 S씨)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과거에는 정보기관에 힘이 있었기 때문에 정보가 몰렸다. 가만히 있어도 ‘갖다 바치는 정보’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정보는 검찰이나 언론보다 못하다.”

    현재 국정원 해외·대북 파트에서 생산하는 자료는 국외일일정보(대외비), 해외산업경제정보·주간해외시사정보(국책민간연구소 배포), 최근 북한동향(국방부 등 배포), 월간 테러정세(검찰·경찰 배포) 등이다. 이 가운데 ‘국외일일정보’는 전 세계 쭛쭛지역에 파견한 ‘해파’ 요원들의 1일2건 정보보고를 분석·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1일2건의 할당식 업무는 ‘외신 짜깁기’의 주범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 점은 국내파트도 마찬가지다. 1일 정보활동 제도는 보고를 위한 정보수집, 심층 정보활동의 제약이라는 폐단을 낳는다. 이 때문에 I.O.(정보관)의 신분이 드러나곤 한다. 따라서 국정원은 국내외 일일정보 보고활동은 경찰에 맡기고 장기활동으로 들어가 정보의 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업무의 전문화를 위해서는, 직렬과 직위만 있을 뿐 직급이 없는 CIA처럼 관리직과 전문직으로 나누어 승진 때문에 전문성을 포기하거나 또는 전문성을 갖춘 직원이 승진을 못해 계급정년으로 옷을 벗는 바람에 전문성이 사장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또 스파이들이 ‘총성 없는 경제전’이 벌어지는 해외로 눈길을 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치권이 국정원의 ‘발목’을 잡는 일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며 국정원도 정치 개입의 유혹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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