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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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 양주’ 홍수… 不法 마시고 “취하네”

보따리상이 면세품 1~2병씩 반입…수집상들 수백병 모아 술집에 공급

  • 입력2005-05-31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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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수 양주’ 홍수… 不法 마시고 “취하네”
    ‘DUTY FREE. HKDNP’.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A 웨스턴 바에 진열된 수입 양주에는 모두 이런 문구의 라벨이 붙어 있다. 하지만 30만원 이상의 고급 수입양주를 마시는 손님들 중 이 문구의 의미를 알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손님들에게 수입양주라면 으레 붙어 있는 문구쯤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듀티 프리’(DUTY FREE)는 어느 나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술이 공항이나 항구 등의 면세점에서 흘러나온 면세품임을 증명하는 표시다. ‘HKDNP’는 ‘HONG KONG DUTY NOT PAID’의 약자. 홍콩 면세점에서 판매됐거나 빼돌려진 면세 양주라는 의미.

    “정품 갖다놓으면 미친 사람”

    어쨌든 분명한 점은 여행자의 휴대품으로 가정에서 소비되어야 할 면세품이 소매점이든 술집이든 업소에서 판매되거나 유통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면세품이지만 위의 술집에서 판매되는 양주들은 세금을 회피하고, 판매상이 폭리를 취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들여온 밀수품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밀수 면세 양주의 유통과 판매가 이 업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울 지역의 경우 양주의 소비가 많은 웨스턴 바나 고급 한정식 업소, 호화 룸살롱이나 요정에 이르기까지 정식 통관 절차를 거친 양주 구경하기가 오히려 더 힘든 실정이다. 애매한 단속 규정은 정부로 하여금 밀수 양주에 대한 단속을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처하도록 만들었다.



    “요즘 정품 양주 갖다놓는 미친 사람이 어디 있어요.”

    11월8일 밤 서울시 서대문구 동교동 홍익대 입구의 A 카페. 업주 김모씨(여·34)는 당당하다 못해 화난 음성으로 밀수 양주를 파는데 항의하는 손님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이 근처 술집을 다녀보세요. 수입 양주 정품이 있는가. 우리 가게도 지금 수입 양주 가격을 더 내릴 예정입니다.” 김씨는 최근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홍익대 입구나 신촌 일대의 카페나 웨스턴 바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양주 가격 인하 경쟁을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김씨에게 밀수 양주를 팔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냐고 묻자 “정품을 갖다놓으면 다른 가게와 경쟁이 안 되는데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며 항변했다. 김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밀수 양주 구하기가 힘들어 밀수 양주와 정품 양주 판매가격의 중간 정도에서 가격을 정했는데 지금은 전부가 면세품이기 때문에 가격을 대폭 인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가게에서 요즘 단연 인기인 수입 양주는 발렌타인 17년산. 몇 년 전만 해도 최고급 양주로 일부 룸살롱이나 요정에서나 유통되던 이 술은 요즘 들어 가격이 20만원대에서 15만원으로 급락하면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웬만한 카페에서 세 사람이 맥주로 적당히 취할 만큼 먹으려면 10만원대의 돈이 쉽게 깨지는 물가에서 15만원 하는 발렌타인 17년산은 호기심 반, 객기 반으로 술꾼들이 쉽게 찾는 메뉴가 된 것.

    면세점에서 발렌타인 17년산의 가격은 50달러 수준. 환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6만원 선이면 살 수 있다. 홍익대 입구 업소에 반입되는 면세품 양주의 가격은 7만원 선으로 나머지 차익은 밀수꾼과 밀수품 유통업자의 몫이다. 주류백화점 같은 소매점에서 12∼13만원(가정용)을 줘야 구입할 수 있는 발렌타인 17년산을 술집에서 15만원에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술꾼들로 봐서는 분명 괜찮은 흥정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정품 발렌타인 17년산의 소매 가격 중 4만∼5만원 가량은 관세와 주세, 교육세, 부가가치세 등의 세금이다. 면세 양주를 먹을 때마다 국가적으로 그만큼의 조세 수입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술꾼들은 망각하고 있는 것.

    신촌 등에서는 발렌타인 17년산뿐만 아니라 시바스 리걸, 로열 살루트, 잭 다니엘, 진빔, 데킬라, 올드 파…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수입양주들이 면세품 구입가의 두 배 정도에서 팔리고 있었다. 세금을 물고 공급되는 정품의 업소 반입가격보다 불과 1만∼2만원 정도밖에 더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것. 지역별, 업태별로 가격이 천차만별이지만 웨스턴 바가 밀집된 홍익대 입구나 신촌, 대학로 등지에서는 가격 경쟁이 심해 이 가격이 거의 고정가격이 돼버렸다. 그러나 강남의 일부 지역은 같은 면세 양주라도 정품 가격의 3∼4배 이상 폭리를 취하고 있는 곳도 많다. 결국 ‘무자료 거래’로 세금 한 푼 내지 않으면서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관세법상 여행자 휴대품으로 1인당 한 병만 반입이 허용된 면세 양주(자가소비용)가 이토록 대량으로 유통, 판매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해답은 술집 주인들의 증언을 통해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홍익대 입구 B카페 업주 이모씨(37)의 말. “잘은 모르겠는데 올들어 중국 보따리 장수들이 들여오는 면세주가 대량으로 술집에 반입된다고 합니다. 보따리 장수들이 한 두 병씩 가지고 들여오면 수집상이 모아서, 중상(중간상인)을 통해 우리가 받는 거죠. 그런데 그 물량이 엄청납니다. 수집상 한 명당 하루에 수백 병을 모은다나요… 한때 잘나갔던 PX 제품은 이제 가격 경쟁력이 없습니다.”

    이씨의 증언은 이 가게에 면세 양주를 공급하는 중상 김모씨(39)에 대한 취재 결과, 모두 사실로 확인됐다. 신변보호를 전제로 취재에 응한 김씨에 따르면 인천 국제여객터미널 일대를 무대로 하루 200∼300병씩의 면세 양주를 모으는 수집상이 3∼4명 있으며, 이들에 딸린 중상들이 10여명에 달한다는 것. 김씨는 자신도 그 ‘중상’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김씨는 “보따리 장수 중 개별적으로 면세 양주를 사서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따리 장수들은 수집상의 ‘따이공’들”이라고 말했다. ‘따이공’은 대공(大公)의 중국식 발음으로 중국에서 물건을 옮겨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중국쪽 면세점에서 수백 병의 양주를 산 수집상이 배에 타면서 이 면세품을 1인당 한 두 병씩 이들 따이공에게 분배하고, 인천 세관을 통관한 뒤 수수료를 주고 나서 다시 거둬들이는 수법을 쓴다는 것.

    인천 국제터미널의 경우 웨이하이, 칭다오, 단둥, 톈진 등 중국 6개 항로에 하루 2∼3편의 배가 왕복하기 때문에 하루에만 300∼400명의 보따리 장수와 조선족 여행객들이 들어오고 있다. 이들이 바로 면세 양주 수집상들의 ‘합법적’ 밀수를 도와주는 ‘따이공’역할을 하고 있는 것.

    인천세관 휴대품 검사과의 한 관계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했다. “매일 매일이 보따리 장수와의 전쟁입니다. 두 병 이상의 면세 양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한 병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휴대품 검사대에선 이것이 밖에서 유통되거나 판매될 것이라는 걸 알 수가 없죠. 그런데 세관을 나가는 순간, 밀수품으로 둔갑을 하는 겁니다. 수집상이 양주를 모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관계자는 지난 9월부터 육안검사 대신 X-RAY 검사를 통해 보따리상들의 휴대품을 검사하고 있지만 중국산 고추보따리 등 수입 농산물 속에 깊숙이 감추어진 양주를 찾아내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털어놨다.

    실제로 인천세관이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올해 9월 말까지 수거한 불법 휴대 면세주는 3만9302병으로 지난해 동기(8921병)와 비교해서는 4배 이상, 지난 98년 한해(1715병)보다는 무려 20배 이상 늘어났다.

    인천 국제여객터미널 주차장은 중국에서 배가 들어온 뒤 서너 시간이 지나면 면세 양주를 수집하려는 봉고차들로 가득 찬다. 이들은 세관 직원들이 보고 있는데도 버젓이 보따리상들을 대상으로 양주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보따리상 김모씨(54)는 “지난 6월 중국인 단체 관광의 폭이 확대되고, 조선족의 친족이나 인척 방문이 확대되면서 중국인과 조선족들도 따이공의 대열에 속속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수집상들과 ‘중상’들의 이런 대담함은 어디서 나올까. “관세청이 우릴 잡을 법적 근거가 없죠, 어쨌든 정식으로 통관된 물품이 아닙니까. 국세청에서 우릴 잡으려고 해도 여객터미널 주차장에선 아직 우리가 유통을 시킨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죠” 여객터미널 주차장에서 만난 수집상 최모씨(43)는 면세 양주 밀수업자들이 법망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씨는 “폭력배들이 낀 대단위 수집상들이 남대문 시장과 강남 일대에 공급하기 때문에 자신들 같은 소규모 수집상들은 일부 업소들만 끼고 장사를 한다”고 말했다.

    서울세관 조사총괄과 조사담당 조양현씨는 면세 양주 유통에 대한 단속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한다. “보따리상을 통한 밀수 양주의 유통 문제는 세관 자체로 처벌하기는 곤란한 상황이다. 정식 통관 절차를 통해 자가소비용으로 들어온 물품이 결과적으로 밀수품이 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에서도 이들에게 관세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식품위생법을 적용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안정성 검사를 받지 않고 수입품을 유통시켰다는 죄목이지만 현재까지 이 법으로도 수집상이나 중간상인을 처벌한 사례는 단 한번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밀수업자에게 식품위생법을 적용하는 검`-`경찰의 고육지책은 자가소비용과 밀수품을 구별할 방법이 없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무자료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곳곳에 널려 있는데도 단속에 나서지 않는 국세청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서울지방국세청 소비계의 최행용씨는 “수집상들과 중간상인들은 추적하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사업자 등록도 하지 않고, 세금계산서를 주고받지 않기 때문에 무자료 거래의 전체 매출을 알아내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다”며 “밀수 양주 소매행위나 업소 반입행위가 적발된다 해도 벌금 형식으로 끝날 뿐, 추징금이나 형사처벌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항변했다. 실제로 서울지방국세청은 지난 6월말 남대문세무서 차원에서 이들 면세 양주를 소매로 판매하고 있는 남대문시장 일대의 양주상 15군데를 적발했지만 벌금만 부과했을 뿐 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물론 남대문시장의 양주상들은 지금도 밀수 면세 양주를 면세점 가격에서 1만∼2만원씩 붙여 버젓이 팔고 있다. 걸리면 벌금을 물고 또 장사를 하면 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럼 우린 뭡니까. 정식 수입품 사러 와서는 밀수 면세 양주와 가격을 비교합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망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국가적 차원의 대책과 소비자들의 밀수 양주에 대한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면세 양주의 범람은 계속될 것입니다.” 수입양주 소매상들은 이렇게 호소한다. 밀수 양주가 ‘조세 정의’를 비웃으며 ‘떳떳하게’ 팔리는 세태를 바로잡을 수는 정말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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