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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핏줄’ 멍에 언제까지…

월북자 가족들 50여년 숨죽인 나날…냉전 이데올로기 그늘 가장 큰 피해자

‘빨갱이 핏줄’ 멍에 언제까지…

‘빨갱이 핏줄’ 멍에 언제까지…
북한 이산가족 상봉 희망자 이길영(남·71). 본적은 충남 홍성군 광천읍 소암리. 찾는 사람은 부 이종근(94), 모 최도원(96), 여동생 이정자(67)….”

지난 2월 지병으로 세상을 뜬 어머니의 이름(이정자)이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자 박찬운 변호사(38)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해 외가 친지를 찾는 사람이 다름아닌 전쟁통에 행방불명된 큰외삼촌(이길영)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조차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외삼촌의 얼굴. 방송에서 언뜻 사진을 확인한 박씨는 적십자사로 달려갔다. 그러나 복사된 서류 한쪽 귀퉁이에 희미하게 나와 있는 외삼촌의 얼굴은 겨우 윤곽만 알아볼 정도였다. “그래도 한눈에 외가 쪽 사람들의 분위기가 느껴졌다”는 박씨는 목이 메어 말문을 잇지 못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물론이고 외가와 가까운 친척들이 툭하면 경찰서나 정보기관에 불려가 시달림을 받았다. 무장공비 침투나 남파간첩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들은 외삼촌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안달했다. 얼마나 진저리나고 끔찍했으면 친지들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얼굴을 전부 도려냈겠는가.” 그는 “50년간 생사조차 모른 채 단 한 차례 연락도 없던 외삼촌이 어느 날 불쑥 연락해온 사실이 기가 막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힌 외가, 철저한 우익 집안이던 친가. 처가조차 집안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죽을 고생 끝에 고향을 등지고 월남한 피난민 가족으로, 박씨를 둘러싼 가족사는 이 땅의 피맺힌 비극적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소위 인텔리였다. 큰외삼촌도 서울에서 대학을 다녀 시골에서 흔치 않은 학식 있는 집안이었다. 6·25전쟁이 터지고 외가 동네가 인공 치하가 되자 둘째 외삼촌은 의용군에 나갔고, 외할아버지는 그 지역 책임자가 됐다. 큰외삼촌 역시 외할아버지와 뜻을 같이해 교육을 담당했다.”

50년 9월 말 국군이 밀려오자 박씨의 큰외삼촌은 재빨리 고향을 등졌다. 의용군에 나갔던 둘째 외삼촌은 물론 식구들 사이에 없었다. 그러나 아내와 딸을 두고 차마 몸을 피하지 못한 박씨의 외할아버지는 ‘빨갱이’와 ‘부역자’ 처단에 혈안이 되어 있던 우익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뿐만 아니라 좌익사상이 뭔지도 모른 채 농사만 짓던 박씨 외할아버지의 남동생까지 함께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외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제사를 지낸 적도 없다. 당시는 시체를 찾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리는 분위기였다.”

유일한 가족으로 남아 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뜨고, 이제서야 가족을 찾는 외삼촌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라는 박씨. 그 역시 어두운 집안 내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사법시험 준비로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박씨가 집에 돌아온 어느 날, 그는 어머니가 정보기관에 연행된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했다. 밤늦게 파김치가 돼서 돌아온 박씨의 어머니는 “집안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더라. 우리 집안 기록과 자료가 책상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며 아들 앞에서 몸서리쳤다. 한평생 자식을 향해 “나서지 마라. 나서면 다친다. 튀지 말고 조용히,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아라”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조심시킨 박씨의 어머니. “그때마다 남자로 태어나 왜 숨죽이고 살아야 하나, 부모로서 자식에게 할 소린가 싶어 반감을 많이 가졌다”는 박씨는 철들고 나서야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한편 방송국에 근무하는 30대 초반 김진욱(가명)씨는 “남북 대립보다 더 복잡하고 답답한 게 우리 집안 현실”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빨갱이’ ‘간첩’ ‘신고’ ‘사형’ 등으로 집안이 쑥대밭이 된 데 이어 남은 가족들마저 지금까지 극한 감정의 골을 풀지 못한 채 ‘이산’ 아닌 ‘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탓이다.

전쟁을 전후해 강원도 내 친북세력이던 김씨 아버지의 형제는 모두 8남매였다. 그중 그의 아버지 손위 형 가운데 두 명이 월북해 졸지에 월북자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이 지난 60년대 말, 월북한 김씨의 큰아버지가 남파간첩이 되어 돌아오면서 집안은 또 한 차례 ‘빨갱이’와 ‘간첩’ 소동에 휘말려야 했다. 그 즈음 군부대가 위치했던 동네 주변에서 이상한 전파가 잡힌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형이 간첩으로 돌아온 사실을 몰랐던 김씨의 아버지는 낌새가 이상하던 차에 소문을 듣고, 옆집에 놀러간 아내를 찾아가 “북으로 간 형님이 내려와 형들이 숨겨 두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마침 정보기관에 다니던 그 집 친척이 내려와 있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는 얘기를 옆방에서 듣게 됐다고 한다. 그 길로 신고가 들어가 나중에 그 사람은 포상금까지 받았지만 우리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에 쫓기던 김씨의 큰아버지는 총상을 입은 채 마을에서 사라졌다. 그 후 ‘자폭했다’ ‘군인들 총에 맞아서 죽었다’는 소문만 동네에 무성했을 뿐 김씨 큰아버지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곧바로 김씨 집안은 ‘사돈의 팔촌’까지 정보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 와중에 아는 것이 전혀 없던 아버지까지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고, 큰아버지 한 분과 친척 한 분은 사형당했다.” 그날 이후 ‘신고’를 둘러싸고 김씨 집안은 첨예한 갈등에 휩싸였다. “아버지는 지금도 만약 그때 곧바로 신고했더라면 집안 전체가 불행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또 자식들까지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신다. 반면 다른 형제분들은 아버지가 어머니께 쓸데없이 그 말만 꺼내지 않았어도 끔찍한 비극은 없었을 거라고 여기신다.”

6년째 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경남씨는 “지금까지 월북자 가족 중 단 한 명도 상봉 신청을 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로 긴 세월 동안 이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를 짐작케 했다. 이회장은 “월북자 가족이나 월남자 가족이 당하는 고통은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월남자로 북한에 남은 가족이 있지만 그들에게 누가 될까 이산가족상봉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런 그가 최근 진행되고 있는 남북회담과 이산가족상봉 문제를 둘러싸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7만 신청자 중 상봉 후보 100명 안에 못 든 나머지 사람들의 허탈감을 어떻게 하겠는가. 무엇보다 이산가족 문제의 첫단추를 잘못 끼운다는 생각이 든다. 월남자 월북자를 떠나서 헤어진 가족의 생사 확인과 편지 왕래가 우선돼야 할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짙은 그늘이 이제는 벗겨지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박찬운 변호사는 “분명한 것은 이산가족 문제가 전전세대만의 고통이 아니며, 개개인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민족 전체가 겪은 비극인 만큼 이제 담담히 과거를 얘기하고 더 이상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주간동아 2000.08.03 245호 (p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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