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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로마는 여성과 ‘생활정치’를 찍었다

2800년 역사상 첫 여성 시장…반부패 앞세운 신생 정당 ‘五星운동’ 바람

  •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

로마는 여성과 ‘생활정치’를 찍었다

부패한 기성 정치인에게 환멸을 느낀 이탈리아 시민들이 생활정치를 앞세운 30대 ‘워킹맘’들을 주요 도시 행정 수장(首長) 자리에 앉혔다. 이탈리아 4대 도시(로마, 밀라노, 나폴리, 토리노) 가운데 로마와 토리노 시장직을 여성이 차지한 것. 이들은 모두 생활정치를 앞세운 제1야당 ‘오성(五星)운동’ 후보여서 집권 민주당이 긴장하고 있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오성운동 후보로 출마한 변호사 출신 비르지니아 라지(37)는 6월 19일 결선투표에서 70% 가까운 득표율로 로마 시장에 당선했다. 2800년 로마 역사상 여성 수장은 처음. 라지 신임 시장은 당선 연설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며 “로마에 준법정신을 되살리고 투명성을 복구하고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정치 vs 포퓰리즘

로마 토박이로 로마3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지적재산권 전문변호사로 일해온 라지 시장은 라디오방송국 PD인 남편, 7세 아들과 살고 있다. 2011년 “지금처럼 엉망인 로마에서 내 아들이 살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신생 정당인 오성운동에 합류했다. 오성운동은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68)가 2009년 좌·우파라는 이분법적 정당체계를 깨고 △물 △교통 △개발 △인터넷 △환경 등 5가지 생활밀착형 이슈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며 설립한 정당이다. 라지 시장은 2013년 로마 시의원에 당선된 이래 특히 교육과 환경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2월 인터넷 투표를 거쳐 오성운동 후보로 선출됐을 때만 해도 라지 시장은 무명에 가까운 정치 신인이었다. 그러나 TV토론 등에서 차분하고 침착하며 논리적인 언변으로 유권자에게 신뢰감을 심었다. 상냥한 태도와 호감형 외모는 젊은 층에게 주효했다. 성장이나 분배 같은 어려운 거대담론보다 쓰레기, 낙서, 교통 등 생활밀착형 주제를 쉬운 단어로 설명하며 표심을 자극했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반대파의 지적에 그는 “토박이라서 로마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30대에 불과한 젊은 나이에 한 차례 시의원을 역임한 게 정치 경력의 전부인 라지 가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로마 시민들의 변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었다. 2014년 말 마피아와 로마시청 공무원의 결탁 의혹이 불거지자 로마 유권자들은 정치권을 불신하고 ‘부패에 찌들지 않은’ 참신한 인물을 원했다. 민주당의 마리오 이냐치오 전임 시장은 지난해 10월 개인적인 식사에 공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사임했다. 이후 로마 시장 자리는 8개월 동안 공석이었다.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도 34세 때 피렌체 시장에 당선된 뒤 시정 경력을 발판으로 총리까지 올랐다. 라지 시장 역시 수도의 행정 수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정치적으로 큰 도약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자동차 기업 피아트의 본산으로 유명한 북부 토리노에서도 오성운동 돌풍이 불었다. 갓 서른을 넘은 정치 신인 키아라 아펜디노(31)가 현직 시장 피에로 파시노(66·민주당)를 꺾고 토리노 시장에 당선된 것. 2주 전 있었던 1차 투표에서 아펜디노는 11%p나 뒤졌지만 결선투표에선 55% 득표율로 역전극을 이뤄냈다. 아펜디노는 당선이 확정된 직후 “이번 선거는 단순히 현재 상황에 항의하기 위한 투표가 아니라 자존심과 변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정치 신인인 아펜디노는 중견 기업인의 딸로 태어나 이탈리아 최고 사립대로 꼽히는 밀라노 보코니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명문 축구팀 유벤투스 FC에서 2년 동안 근무했고, 결혼 후 2010년 오성운동에 입문했다. 2011년부터 토리노 시의원으로 일하며 시정 감시자 구실을 했다. 파시노 시장이 그를 ‘아니요 여사(donna di no)’라고 부를 정도로 시정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산업시설이 밀집해 노동조합 세력이 강한 토리노는 23년 동안 중도좌파 민주당이 한 번도 권좌를 놓지 않았던 곳이다. 토리노에서의 패배가 집권 민주당에게 뼈아플 수밖에 없는 이유다. 5개월 된 딸의 엄마이기도 한 아펜디노는 출산 직후임에도 젊음이 느껴지는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펼쳤고, TV토론에서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다.

두 여성 시장을 배출한 오성운동은 이번 결선투표 20곳 중 19곳에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조직력과 인재풀이 약해 후보를 많이 내지는 못했으나 공천한 곳에선 대부분 승리했다. 그동안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기성 정치만 비판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이번 선거로 2018년 총선을 앞두고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사실 오성운동은 전 국민 인터넷 무료 제공, 기본소득 지원, 리라화 복귀, 유럽연합 탈퇴 관련 국민투표 등 인기에 영합한 포퓰리즘 성향의 공약을 많이 제시해온 게 사실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자신들의 실력보다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반사이익을 얻은 측면이 강하다. 로마와 토리노 등의 시정을 통해 빈약한 조직력과 인재 부족을 극복하고 능력 및 비전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도 떠안게 된 셈이다.



2024년 올림픽 유치전, 갈등 불가피

당장 미래가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로마는 공공부채만 120억 유로(약 15조8400억 원)에 달하고 도시 인프라도 열악해 생활밀착형 공약을 제대로 실천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마피아 등 범죄조직이 각종 공공입찰에 뿌리 깊게 연루돼 있는 점도 큰 부담이다. 토리노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당선된 여성 시장들은) 재정 건전화, 부패와 전쟁이라는 버거운 과제를 앞두고 있으며 남성이 대부분인 주류 정치권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시장 당선이 ‘독이 든 성배(聖杯)’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2024 로마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렌치 총리는 이탈리아 부흥의 상징으로 2024 올림픽 유치전에 뛰어들었으나 로마는 이미 1960년 올림픽을 개최한 바 있다. 경쟁 도시는 프랑스 파리, 미국 로스앤젤레스,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 라지 시장은 선거 초창기 “로마는 올림픽 같은 거대 이벤트 유치보다 일상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며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인프라 투자 등에 필요한 대규모 공공입찰이 불가피하므로 이와 관련된 각종 부패가 더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반면 로마 시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려면 올림픽 관련 국가보조금을 타내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앞으로 라지 시장이 올림픽 유치와 관련해 긍정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게 현지 언론의 전망이다.  







주간동아 2016.06.29 1044호 (p62~63)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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