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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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이냐 개혁이냐

관료 인선·재벌 조사 속도조절 등 ‘안정’에 무게 … 일부 학자들 “일관된 개혁 필요” 주장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3-03-20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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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이냐 개혁이냐

    3월10일 과천청사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경제5단체장 오찬 간담회에서 노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과연 재벌개혁을 하겠다는 것인지 벌써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3월14일 노대통령이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하 금감위원장) 후임으로 이정재 전 재정경제부 차관을 내정하자 재벌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해온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나 소장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에 참여했던 소장학자들이 적극 밀었던 J교수가 탈락한 데 따른 불만의 소리였다. J교수는 그동안 재벌개혁을 소리 높이 주장해왔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국제 금융시장의 메커니즘을 잘 알기 때문에 금감위원장에는 적임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정재 전 차관의 발탁 배경은 ‘개혁’보다는 ‘안정’에 무게를 싣기 위한 차원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가 “이 전 차관의 경우 금융은 물론 실물경제에도 밝아 현재의 금융시장 불안을 조기에 진정시킬 수 있고, 최근의 SK그룹 문제도 원만하게 잘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인사 배경을 밝힌 대목에서 이런 의도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인수위 경제1분과 위원으로 참여했던 정태인 박사는 실망감을 표시했다. 정박사는 “분식회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던 2001년 이후에도 SK글로벌은 3000억~4000억원의 분식회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이는 결국 제도보다는 사람이 문제라는 얘기인 만큼, 현행 제도 하에서도 원칙적이고 일상적으로 시장에 대한 감시 감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금감위원장이 되면 분식회계나 시장 투명성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대통령 기회 있을 때마다 “시장개혁 꾸준히”



    물론 노대통령은 재벌(시장)개혁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시장개혁은 꾸준하게 하되 흔들리거나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조윤제 경제보좌관도 3월13일 브리핑을 통해 “참여정부는 시장을 통한 개혁을 늦추지 않을 것이나 노대통령이 몇 차례 언급한 것처럼 개혁할 의지가 있는 기업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개혁을 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부가 ‘SK 쇼크’ 이후 국세청 세무조사나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당분간 유보 또는 완화하기로 한 방침을 밝히자 또다시 ‘개혁이 먼저냐, 안정이 우선이냐’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대체로 관료들은 ‘안정’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고(그렇다고 관료가 모두 개혁과 거리가 멀다는 얘기는 아니다), 인수위에 참여한 학자 그룹은 ‘안정’ 못지않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정부의 ‘개혁 속도조절’ 방침은 고건 국무총리가 3월12일 경제단체장 초청 만찬 간담회에서 직접 밝혔다. 고총리는 이 자리에서 “공정위가 부당 내부거래 일제조사를 한다고 했는데 경제가 나쁜데 이런 조치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다”면서 “기업을 몰아치는 일이 없도록 국정을 조정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고총리의 이런 방침에 대해서는 인수위에 참여한 관료들도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이들은 “정책을 집행하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시장 자체가 깨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우선 안정적으로 현재의 불안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얘기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 상황에서는 기업의 불안심리를 잠재우는 등 ‘위기관리’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

    안정이냐 개혁이냐

    SK글로벌 분식회계 파문으로 투신권에 대한 환매 요청이 쇄도하자 주요 투신사 사장들은 3월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투자신탁협회 회의실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반면 한성대 무역학부 김상조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1999년 ‘대우사태’ 처리 과정을 반면교사로 삼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정부는 대우사태로 인한 금융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대우채(債) 펀드 환매 제한조치 등을 통해 ‘위기관리’에 나서 각종 대란설 등을 잠재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런 위기의 재발 방지를 위한 구조개혁은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학자도 “재계 서열 3위 그룹인 SK에서 분식회계가 있었다는 것은 재벌개혁에 성공했다는 김대중 정부의 주장이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외국인 투자자들도 한국 기업들은 분식회계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당 내부거래 조사 등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조치를 포기한 것은 한국경제의 신뢰도만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금융시장 불안은 시장 불투명성이 원인”

    외국인 투자자를 자문하고 있는 한 투자자문회사 사장은 “현 경제 상황을 위기로 보느냐, 아니면 단순한 경기침체 국면으로 보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최근 ‘SK쇼크’로 인한 금융시장 불안은 한국시장의 불투명성이 근본 원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당 내부거래 조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SK글로벌이 외국인 투자자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기업이어서 그나마 외국인 투자자들의 동요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개혁이냐, 안정이냐’ 논란은 인수위 시절부터 계속돼왔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경제부총리에 경제 관료 출신의 김진표 인수위 부위원장을 임명, ‘안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해석을 낳게 했다. 인수위에 참여했던 한 청와대 비서관은 “당시 인수위에서는 관료들보다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컸지만 현재는 상황이 역전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들과 학자들 간 긴장관계는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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