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신의 정원 조선 왕릉34

10살 때 요절한 효장세자 사후 양자 정조가 “아바마마”

추존 진종과 효순왕후 영릉

10살 때 요절한 효장세자 사후 양자 정조가 “아바마마”

10살 때 요절한 효장세자 사후 양자 정조가 “아바마마”

하늘에서 본 영릉 전경. 뒤편에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의 순릉이 보인다.

영릉(永陵)은 영조의 맏아들로 세자에 책봉된 지 3년 만인 10세에 요절한 효장세자(孝章世子, 추존왕, 1719~1728)와 그의 비 효순왕후(孝純王后, 1715~1751) 조씨의 능이다. 영조는 효장세자를 정조의 양부로 지명했고,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眞宗)으로 추존했다.

영릉은 국도 1번을 타고 문산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있다. 이곳은 제8대 왕 예종의 원비였던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가 세자비로 있다 17세에 요절하자 조성된 능원으로, 이후 조선 왕실의 왕릉군이 됐다. 장순왕후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한명회의 딸로, 당시 임금이었던 세조가 직접 공릉의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성종의 원비이며 한명회의 셋째였던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가 19세에 죽자 이곳에 모시고(순릉), 수백 년 후 효장세자까지 모시니 공교롭게도 요절한 세자와 세자비가 한자리에 잠들게 됐다. 공릉, 순릉, 영릉을 합쳐 파주 삼릉이라고 한다.

자식 복 없는 영조의 큰아들

조선의 임금 중 최장수(83세) 임금이며 통치기간(51년 7개월)이 가장 긴 영조에게는 2명의 왕비와 4명의 빈이 있었으나 왕권을 이을 왕자는 2명뿐이었다. 큰아들이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난 효장세자이고, 작은아들이 영빈 이씨에게서 얻은 사도세자다. 효장세자는 10세에 병사했고, 사도세자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 영조의 손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었다. 자식복은 없는 영조였다. 그러나 아버지 덕분에, 즉 영조가 효장세자를 정조의 양부로 지명했기 때문에 효장세자는 추존왕이 됐고 이후 추존 황제로서 그의 무덤인 영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진종은 숙종 45년(1719) 2월 15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의 창의궁에서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에 봉해졌고, 이듬해 세자에 책봉됐다. 그러나 경의군은 영조 4년(1728) 11월 16일 해시(亥時)에 창덕궁 진수당에서 원인 모를 병으로 훙서(薨逝)했다. 세자빈과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안타까움은 더욱 깊었다. 3개월 뒤 효장세자는 영릉에 안장됐다.

아들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으로 영조는 영릉을 소현세자의 예에 따라 정성 들여 조영했다. 그리고 평소에는 별로 찾지 않던 공릉과 순릉을 참배한 뒤 효장세자의 묘를 찾아 크게 애통해했다. 기록을 보면 능원 혈의 깊이는 8척 9촌으로, 현실(玄室) 4곳에 명기(明器), 복완(服玩), 증옥(贈玉), 증백(贈帛)을 넣고 자물쇠로 잠근 뒤 사헌부 장령이 서명했다. 그리고 참찬(參贊·조선시대 의정부 소속의 정이품 관직)이 흙 9삽을 덮고 회(灰)를 쌓아 막았다.

효장세자는 예절이 바르고 배움에 정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병세가 위독했을 때도 스승이 병문안을 오면 벌떡 일어나 용모를 단정히 해 맞이했고, 빈객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도 일어났다. 그러나 약효가 없음을 알자 “번거롭게 약을 쓰지 말고 천명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점차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영조가 얼굴을 효장세자에 갖다 대며 “나를 알아보겠느냐”고 묻자, 가녀린 목소리로 효를 다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세자빈과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이별

10살 때 요절한 효장세자 사후 양자 정조가 “아바마마”

(위)동원쌍릉 형식으로 조성된 영릉. (아래)영릉의 문석인은 유난히 작고 동안이어서 10세에 요절한 효장세자의 얼굴을 닮은 듯하다.

효장세자의 무덤은 처음에 묘의 형식으로 조영했으나, 효장세자 사후에 양자로 입적한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해 능호를 영릉이라 했다.

효순왕후는 이조참의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영조 3년에 전국에 금혼령을 내려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해서 최후의 3인 중 간택된 당대 최고의 규수였다. 13세에 9세인 효장세자와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사별했으니 왕실 생활이 두렵고 막막했을 것이다. 시아버지 영조는 세자빈을 사중(四重)의 칭송이 자자한 인물로 평가했다. 사중이란 법도 있는 말씨, 덕이 있는 행실, 위의(威儀·위엄과 예의)가 있는 외모, 남에게 본보기가 되는 호감을 말하는 것으로 중언(重言), 중행(重行), 중모(重貌), 중호(重好)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왕세자는 9세나 11세에 결혼했는데, 이는 기수(奇數)와 우수(數)의 논리 때문이다. 효장세자도 10세에 혼례를 올리려다 9세에 간택을 서둘렀다. 왕실의 간택은 도성 안이나 경기 일원, 더욱 확대해 삼남이나 팔도에서 하는 경우가 있으나 효장세자빈은 영조가 전국에서 간택하도록 했다. 왕세자비의 중요성을 고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실의 결혼을 위해 전국에서 만 15세 이하 규수에게 금혼령을 내렸다. 이 중 금혼이 제외되는 규수는 왕실과 같은 성씨(전주 이씨), 세자의 이종·고종 8촌까지, 왕비의 동성 7촌 이성 6촌까지, 전주가 본관인 성씨, 부모 모두 생존하지 않은 사람, 후취(後聚)한 사람 등이다. 그러나 영조는 세자빈의 간택에서 후취한 사람을 구별하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자신이 후취한 출신임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세자빈은 시아버지 영조에게 효를 다했다. 실록에 따르면 성품이 담박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정갈했다고 한다. 지아비를 일찍 보낸 죄책감에 지아비의 몫까지 효도하고자 했다. 매일 영조에게 음식 수발을 했으며, 자신이 병을 얻었음에도 문안드리는 예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영조는 세자빈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효순(孝順)이란 시호를 직접 지어 내렸다. 세자빈은 영조 27년(1751) 11월 14일 창덕궁 건국당에서 37세로 승하했고, 진종의 능침과 나란히 우남좌녀의 쌍릉으로 모셔졌다.

영릉은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줄기에 을좌신향(동남에서 북서)하고 있다. 정자각 우측에 2개의 비각이 있는데, 위쪽 비각에는 능 조성 당시 세자 신분의 능비인 구비(舊碑)가 있고 비면에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 현빈부좌(朝鮮國 孝章世子墓 孝純 賢嬪俯左)’라고 새겨졌다. 또 아래쪽 비각에는 신비 2개가 있는데, 하나는 1777년 정조 때 왕으로 추존한 뒤 세운 비이고, 다른 하나는 1908년에 순종황제 때 황제로 추존하고 세운 것이다. ‘대한진종소황제영릉, 효순소황후부좌(大韓眞宗昭皇帝永陵 孝純昭皇后左)’라고 새겨졌다.

10살 때 요절한 효장세자 사후 양자 정조가 “아바마마”

(왼쪽)세자의 예에 따라 조영된 영릉.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고, 하계(무석인)의 공간이 없는 게 특징이다. (오른쪽)영릉의 고석.

세자 묘로 조성됐다 왕릉 형식 갖춰

영릉은 쌍릉 형식으로 세자묘의 예를 따라 조성됐다가,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왕릉의 형식을 갖췄다. 그래서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이 무석인, 즉 무인 공간의 하계가 없다.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됐고 석호와 석양, 문석인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문석인은 조선 전기의 능인 공릉에 비해 다소 마르고 작으며 조선 후기 형태를 이루고 있다.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동안(童顔)이나 얼굴에 비해 몸이 왜소하다. 마치 효장세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에는 주름이 새겨졌다. 문석인과 함께 중계(中階)에 배치된 석마도 조선 전기의 것과 달리 겸손하게 머리를 구부린 모습이다. 영릉의 금천은 버들치, 임진강 참게가 사는 등 우리 전통 생태계가 잘 보존돼서 생태경관을 관찰하기에도 좋다.

효장세자의 배다른 동생인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영우원으로 조영됐다가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현융원으로 하여 화성에 천장됐다. 이후 고종 때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으로 승격됐다. 효장세자의 양아들인 정조의 능원은 그의 친부의 능원이 있는 화성의 융릉 서쪽 언덕에 있다. 능호는 건릉(健陵)이다.

능원을 지키는 느티나무는 밖에서 오는 잡귀 쫓아

10살 때 요절한 효장세자 사후 양자 정조가 “아바마마”
전통 마을과 건물 입구, 능역 입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게 마련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는 집 앞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으면 삼정승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 삼괴(三槐)는 삼정승을 상징한다.

느티나무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보호수로 지정된 대표적인 향토수종이다. 문자적 해석을 해보면 느티나무는 한자로 괴(槐)다. 나무 목(木) 변에 귀신 귀(鬼) 자가 붙었으니 마을이나 집에 들어오는 잡귀를 몰아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을 어귀나 집 입구에 심어 정자목과 집회장소로 사용했다. 왕궁에서는 입구에 느티나무보다 회화나무를 심었다. 중국의 자금성 오문(午門·정문) 앞과 경복궁 뒤편 칠궁 앞에도 회화나무가 있다. 이 회화나무도 한자로 괴(槐)다. 회화나무는 콩과 식물로 질소를 만들어 땅을 비옥하게 한다. 그래서 궁궐 입구 외조(外朝) 공간에 심어 삼정승을 나타냈다. 어릴 때 수피(나무껍질)가 푸르러서 충성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서당에서 벌칙으로 종아리를 맞을 때 회나무 가지를 써서 회초리라고도 한다. 능역 입구의 느티나무는 삼정승이 능역을 지키며, 밖에서 오는 잡귀를 쫓는 의미가 있다.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 입구에도 느티나무가 잘 보존돼 있다.


주간동아 2010.12.27 768호 (p82~84)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162

제 1162호

2018.11.02

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