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0

2010.04.06

들러리 신세… 튀면 손해… 집단지성 맥 못 춘다

직원이 인정하는 성공사례 흔치 않아 … ‘평평하고 열린’ 기업문화부터 정착시켜야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0-03-29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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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에서 무슨 학습조직(CoP·Community of Practice)을 만들라고 하면 ‘이번엔 네가 들어가라’는 식으로 각 부서에서 몇 명씩 차출합니다. 학습조직 게시판에 활동보고서 올리는 일은 막내 몫이고요. 이런 게 회사 성과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정유업체 대리 A씨)

    “업무 관련 지식을 올리는 사내 게시판이 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에 열심히 올렸다가 상사들한테 ‘네 일이나 제대로 하라’는 핀잔을 들었어요. 그 다음부턴 안 해요.”(제조업체 입사 4년차 B씨)

    “다른 팀이 하다가 실패한 사업안을 던져주면서 태스크포스(TF)를 꾸리라고 하면 정말 죽을 맛입니다. 어차피 해도 안 되는 걸 다들 아니까요.”(대기업 계열사 차장 C씨)

    집단지성 활용이 대세라고 하지만 이를 놓고 기업과 직원의 반응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국내 기업의 현주소다. ‘아이디어 창고’인 사내 게시판은 개점휴업 상태이기 일쑤고, 학습조직은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러 부서의 지혜를 모으자’는 취지에서 TF가 구성되면 이 팀에 ‘끌려가는’ 직원들은 울상을 짓는다. 대체 왜 그럴까?

    “사내 게시판은 네이버 지식인에 불과”



    먼저 집단지성 활동이 가욋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데 여기에 당장의 업무와는 상관없는 아이디어를 내라든가, 학습조직에 참여하라든가 하면 반감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 당장의 업무부터 처리하기 원하는 부서장 눈치를 살피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업들이 집단지성을 활용한 지식경영의 ‘혈관’으로 홍보되는 학습조직이 요식행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A씨는 “그러니까 학습조직은 카페 자료실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업무상 필요한 정보를 게시판에 올려놓는 수준에 그친다는 것. 그는 “그렇게 올린 자료 덕분에 새로 직원이 오면 인수인계가 빠르긴 하지만, 애초 학습조직의 취지대로 회사와 직원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 같진 않다”고 덧붙였다.

    상명하복의 경직된 조직문화도 집단지성 활성화를 막는 걸림돌이다. LG경제연구원 박은연 연구위원은 “‘튀면 손해’라는 한국의 조직문화 특성상 모두가 보는 사내 인트라넷에 자기 의견을 개진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인사조직투자컨설팅업체인 타워스왓슨(Towers Watson)은 2008년 한·중·일 리더십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한국이 리더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일본과 중국에 비해 매우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회사 인사컨설팅사업부 최현아 상무는 “국내 기업 임원도 자신의 ‘파워’가 의사결정 권한에서 나온다는 의식이 뿌리 깊다”며 “때문에 위계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 교환이 어렵다”고 분석했다.

    몇 년 전 모 그룹사에서는 오너의 불법행위 문제가 불거지자 직원의 다양한 의견을 수집하고자 개설한 사내 게시판을 아예 닫은 일이 있었다. 성균관대 이건창 교수(경영학)는 “경직된 기업문화 탓에 정작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은 다뤄지지 않는다”며 “대개의 사내 게시판은 ‘네이버 지식인’ 수준에 불과한 일상적 지식·정보만 올라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이 신사업을 추진할 때 한 분야의 전문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요즘 기업은 기술, 영업, 마케팅 부서는 물론 사외 전문가, 협력업체 등까지 참여하는 TF를 구성해 신사업을 추진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집단지성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TF를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정평 난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의 얘기다.

    “A부서가 추진하는 사업이 잘 안 될 것 같으면 TF를 꾸리자고 제안한다. 이 부서, 저 부서에서 사람을 끌어모으면 결국 책임 소재가 모호해진다. 즉 A부서는 혼자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TF를 통해 면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TF가 악용되기도 한다.”

    들러리 신세… 튀면 손해… 집단지성 맥 못 춘다
    기업 내 최고의사결정권자가 TF에 의사결정을 위임해놓고 뒤늦게 철회하는 것도 TF 불신에 한몫을 한다. 얼마 전 모 중견 수출업체는 각 부서의 유능한 직원을 발탁해 회사의 신사업에 관한 TF를 꾸렸다. 외부 전문가까지 영입해 서너 달 열심히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 TF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했다. 그러나 오너의 ‘거부’로 몇 달치 고생이 하루 만에 물거품이 됐다. 이 회사 직원은 “허탈한 것은 물론이고, 몇 달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셈이 돼 경력에도 타격을 입은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집단지성을 잘 활용하는 선진기업을 벤치마킹하는 시도도 있지만, 아직 운영 면에서 서투른 탓에 실패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IT 관련 대기업의 계열사도 그중 한 사례다. 이 회사는 매주 금요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10명 안팎의 직원이 모여 신사업을 개발하도록 독려했다. 하지만 각종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데 그쳤을 뿐, 신사업으로 연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팀장급인 한 직원은 “역할이 다른 직원들로 팀을 꾸렸어야 하는데 그냥 친한 사람끼리 모였고, 아이디어가 과연 현실성 있는지 판단해주는 전문가가 없었던 점이 실패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회사가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가 결국 아무 일도 이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지성이 활성화되려면 사내 인트라넷, 학습조직, TF 등 하드파워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를 잘 작동시킬 소프트파워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목표가 분명하고 실현 가능해야 하며, 개인적 보상과도 연계돼 있어야 한다. 집단지성 성공사례를 직원들에게 홍보함으로써 회사가 개개인의 의견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현아 상무는 “한때 국내 기업 사이에서 ‘호칭 파괴’ 바람이 불었는데, 이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부장님’ ‘상무님’ 같은 직급 호칭을 없앰으로써 계급주의적 조직문화를 완화해보라는 조언이다.

    자발적이고 즐거운 참여가 핵심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소프트파워는 ‘일이 즐거운’ 기업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집단지성을 가장 성공적으로 실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꼽히는 구글과 페이스북을 잠시 참고하자.

    구글 직원들은 ‘지메일 리플라이(reply)’를 즐긴다. ‘아이를 낳았다’ ‘승진했다’ 등 개인사를 전 직원에게 e메일로 보내면 ‘축하한다’ ‘기쁘시겠다’ 등의 답신이 즉각 날아온다. 인사업무를 담당하는 구글코리아 정혜정 씨는 “구글코리아 직원이 100명인데 전 직원에게 e메일을 보내면 70개 정도의 답신을 받는다”고 전했다. 또 구글은 피어 보너스(Peer Bonus·동료 추천 보너스) 제도를 운영한다. 일 잘한 직원을 누구나 추천할 수 있고, 추천받은 직원은 보너스를 받는다. 정씨는 “돈을 벌었다기보다 동료들에게서 인정을 받았다는 기쁨이 더 크다”며 “구글의 수평적 조직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 보너스 제도”라고 말했다.

    페이스북은 종종 ‘헥카톤(Hackathon)’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누군가가 “헥카톤하자”고 외치면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밤새워 아이디어와 지식을 교환하며 공동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보상이 있는 것도, 참여하지 않는다고 불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박은연 연구위원은 “페이스북 직원들은 ‘즐거워서’ ‘재미있어서’ 참여한다고 말한다”며 “바로 이런 자발적 참여가 집단지성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지식경영’을 모토로 국내 기업들은 사내외 브레인을 활용하는 집단지성에 나섰다. 하지만 ‘집단지성의 신(神)’으로 불리는 국내 기업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영광의 월계관을 쓸 첫 번째 기업은 과연 어디일까. 문제는 문화다.

    고객 브레인은 찬밥 신세?!

    무늬만 ‘고객 게시판’ … 아무리 좋은 의견도 무시


    들러리 신세… 튀면 손해… 집단지성 맥 못 춘다

    마이스타벅스아이디어 홈페이지의 메인 화면.

    2009년 7월 미국에서 흥미로운 보고서 하나가 발표됐다. 디지털전략전문회사 알티미터(Altimeter)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는 미국 기업들에 대해 연구한 보고서였는데, 핵심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소비자와의 대화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기업일수록 수익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스타벅스. 6명으로 구성된 소셜 미디어 팀을 두고 있는 스타벅스는 고객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도록 한 홈페이지 ‘마이스타벅스아이디어’(www.mystarbucksidea.com)를 운영한다. 또 2008년 10월부터 페이스북을 활용, 380만여 명의 팬을 보유하고 있다. 트위터도 활용하는데, 팔로어(follower·트위터상에 친구로 등록된 사람)가 28만여 명이다. 마이스타벅스아이디어는 고객과 스타벅스의 토론 형식으로 운영되고, 페이스북은 고객 문의에 대한 즉각적 응답 위주다. 또 트위터는 메뉴 변경사항이나 커피분쇄기의 날을 새로 갈았다는 등 매장 바리스타가 직접 올린 트윗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처럼 소셜 미디어 각각의 특성에 맞도록 고객과의 대화를 시도해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국내 기업에서는 스타벅스처럼 완전히 열린 태도로 고객과의 집단지성을 적극 꾀하는 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고객이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홈페이지 고객 게시판도 수동적으로 운영되기 일쑤다. 일단 회원가입을 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지 못하도록 돼 있는 경우가 많다. 모 대기업이 운영하는 식음료업체 서비스에 대한 개선사항 10여 가지를 대표이사에게 전달한 적 있는 이모 씨는 “내 의견이 존중된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객 게시판에 올린 글에 대해서 동문서답을 하거나, 여러 질문 중 한 가지만 골라 대답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소비자학과)는 “소비자 의견과 요구를 제품에 반영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면서 “연령, 소득, 성별, 라이프스타일 등에 따라 소비자 층위는 무척 다양하므로 기업은 자신의 타깃 고객층을 잘 대변하는 소비자와의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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