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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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 사이버 10대들

시솝으로 웹마스터로 게이머로 ‘밤의 황제’… 현실의 나 가두는 ‘감옥’ 될 수도

  • 입력2006-04-25 1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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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의 얼굴’ 사이버 10대들
    서울 S여고 2학년 이륜정양은 학교에선 말수 적고 수줍음 많은 ‘범생’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휴대폰도 아직 없다.

    그러나 이양은 밤이면 ‘마계의 여왕’이 된다. 그녀는 1600여명을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인터넷포털 사이트 네띠앙 10대 동호회 ‘우혁동’의 시솝(sysop·운영자)이다. 우혁동의 정식 이름은 ‘퇴마록의 저자 이우혁을 따르는 사람들의 동호회’.

    이양은 매일 밤 회원들과 함께 작가 이우혁씨의 저서 20여권에 대한 토의를 진행한다. 염력, 텔레파시, 공간이동에 대한 논쟁으로 불꽃이 튄다. 최근엔 마계의 괴물과 손잡은 왜군에 대항하는 초능력 영웅의 얘기인 ‘왜란종결자’란 책을 ‘해부’하고 있다. 스스로 팬터지소설을 써서 올리기도 한다. 이양은 “이곳에서 난 리더십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우혁동의 세계에서 나는 또다른 나를 발견한다”고 말했다.

    “게임 속 주인공으로 변신 만족”

    그녀의 변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나우누리 ‘웹디자이너’ 포럼에선 어엿한 ‘웹마스터’가 된다. 나우누리 ‘온라인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생들이 다운로드받을 과제물을 자료실에 올려줄 땐 ‘선생님’으로 변신한다. 그러다가 인터넷 고교 조인트 동호회에 들어가 채팅하면 그녀는 미팅자리에 나간 말 잘하는 여고생으로 바뀐다.



    이륜정양은 앞으로 몇 개의 얼굴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나’는 ‘무한대’ 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서울 경신고등학교의 ‘컴퓨터 박사들’은 요즘 경찰의 의뢰로 ‘사이버 경찰’이 됐다. 이 학교의 한 학생은 “해킹경험이 있는 애들이 해커를 잡는다. 사이버 세계에서의 신분은 때때로 이렇게 극단적으로 바뀐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가장 극적으로 변신하는 방법은 게임 속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금년 2월 유니텔이 주최한 스타크래프트대회에서 4만명을 제치고 우승한 서울 강남공고 2학년 김정민군은 사이버공간 속의 자신에 더 만족한다. 그는 자신을 ‘테란족’이라고 부른다. “송파구 집 근처 I PC방에서 매일 3, 4시간씩 테란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프로게이머’로 평생을 살 생각이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가 없어지면 난 다른 사이버 전투현장을 누비고 있을 겁니다.”

    김군은 자기가 다니는 PC방의 다른 게임마니아를 소개해 줬다. 리니지게임에 빠진 19세 여성이었다. “한 달에 하루도 안빠지고 하루종일 리니지만 합니다. PC방에서 밤을 꼬박 샌 뒤 집에 가서 금새 옷을 갈아입고 와 또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땐 세 끼니를 모두 PC방에서 해결합니다.”

    와이드정보통신 최연욱이사로부터 네티즌이 리니지에 몰입하는 과정을 들어보았다. “사용자는 자신의 ‘아바타’(분신)를 통해 친구를 사귀고 결혼하고 ‘혈맹’이라는 가족도 만듭니다. 상인도 있고 군인도 있고 심지어 사기꾼도 있습니다. 등급이 올라가면 칼, 변신반지 등 아이템들을 얻게 됩니다. 16레벨쯤 되는 초보수준에서 최고수인 50레벨에 오르기 위해선 이별의 슬픔, 술수, 다른 아바타와의 우정과 사랑, 죽음을 건 전쟁을 겪어야 합니다. 한 편의 인생과 같죠. 매일 5, 6시간씩 게임을 해도 한두 달로는 별로 자신의 신분을 높이지 못합니다. 그만큼 긴 여정입니다. 컴퓨터를 켜면 자신은 잠에서 깨어난 아바타가 됩니다. 말 그대로 아바타는 자기 자신의 살아 있는 분신으로 변해가는 겁니다.”

    (♥(00)♥). 인터넷동아리 ‘zclub 이모티콘 동호회’ 초기화면에 뜬 ‘이모티콘’이라 불리는 ‘언어’ 다. 번역하면 ‘사랑에 빠진 돼지’. 이들은 자신들을 사이버세계의 ‘특별한 존재’로 바꾸기 위해 ‘언어 개조작업’을 택했다.

    인터넷은 대중과 개인간의 쌍방향 통신이다. 그래서 ‘나’는 현실세상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세상에 알려지기도 한다. 승률조작과 잦은 반칙으로 한국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의 명예가 추락하고 있는 요즘 고수 5, 6명을 혼자서 해치우는 실력에다 자기 편을 위해 총을 대신 맞기까지 하는 무명의 의리파 게이머(ID Fire)가 나타났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그는 게이머들 사이에선 이미 전국적인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인터넷의 ‘나’는 때론 거짓 정보로 가득 찬 엉터리이거나 현실의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3월23일 서울 서교동 I PC방에서 만난 M중학교 2학년 김모군은 ‘여대생’과 채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회사원으로 소개했다. “어차피 상관없어요. 저쪽도 진짜가 아닐 수 있으니까.” 옥션에 따르면 인터넷사이트에 등록할 때 주민등록번호나 신용카드번호를 허위로 만들어주는 10여종의 프로그램이 유통중이다.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에선 ‘신분세탁’도 가능한 셈이다.

    고등학교 3학년생인 박모군은 두 달 전부터 학교에 안간다. 그는 게임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부모는 그를 서울 강동성심병원에 데려갔다. 그는 의사에게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담당의사는 “방해받지 않고 비현실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기 위한 구실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인터넷은 인간의 ‘환생본능’을 충족시킨다. 무한대로 변신할 수 있는 자유를 만인에게 ‘평등’ 하게 주는 공간이다.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현실의 위치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인터넷은 힘을 준다” 고 말한다. 학교에서 야단이나 맞는 평범한 중학생이 자신이 꿈꾸는 존재들로 변해 즐거움을 찾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인터넷 속의 나에게 ‘병’적으로 몰입할 때 생긴다. 이때 현실의 ‘나’는 심혈관계통 금단증세, 운동부족으로 인한 체력저하, 만성적 수면부족, 일상생활의 장애, 대인관계를 꺼리는 ‘자폐’적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서울 강동성심병원 정신과 신지용교수). 신교수는 “가상현실을 즐기면서도 절제력을 갖고 현실의 나와 가상의 나들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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