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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로 돌아보는 사각형의 진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로 돌아보는 사각형의 진실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신화에서 영웅은 남들보다 더 큰 ‘무언가’에 삶을 바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2000·스티븐 돌드리 감독)의 주인공 빌리 역시 그런 면에서 ‘작은 영웅’입니다. 신화 속 영웅처럼 ‘무언가’에 이끌려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하거든요. 탄광 파업에 참여하는 아버지와 형 대신 치매 증상이 있는 할머니를 챙기고, 돌아가신 엄마 묘지를 정성껏 돌보는 아이, 수업시간에 요령을 피우거나 보고 싶은 책을 몰래 가져오기도 하는 평범한 남자아이가 훗날 뛰어난 발레리노로 변신합니다. 그 변용이 이뤄지는 장면에서 종종 등장하는 모양이 있습니다. 사각형은 변방의 작은 소년이 원석을 갈고 닦아 다이아몬드로 거듭나는 공간입니다. 빌리가 거쳐 가는 사각형을 따라가 볼까요.


주어진 현실의 사각형

빌리는 권투를 좋아하는 아이입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남자아이는 권투를 좋아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바를 찾을 겨를이 없었던 겁니다. 권투는 미친 짓이라는 친구에게 핀잔을 주며 호기롭게 오른 곳이 사각의 권투 링입니다. 빌리는 4개의 모서리가 형태와 위치를 고정하는 닫힌 공간이 힘겹습니다. 팔을 뻗어 상대를 치기는커녕 춤추듯이 요리조리 팔을 휘두르다 크게 한 방 맞고 쓰러집니다. 

사각형의 겉모양은 정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변화가 없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자연에는 사각형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구분하면서 사각형을 만듭니다. 대지, 땅에 선을 그어 만든 사각형에 나의 공간, 당신의 공간 또는 뜻을 함께하는 우리의 공간 등 소유권을 부여합니다. 확고하게 선을 그은 모양은 안정감을 주지만 지나친 경계를 형성해 소통을 가로막습니다. 사각형의 링은 빌리가 타고난 사회·문화적 환경의 고정관념을 상징하는 틀과 같습니다.


사각형 밖 새로운 세계로 입문

권투장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핀잔주던 선생님이 오히려 빌리에게 사각형 밖 새로운 세계를 연결해주는 전령관 구실을 합니다. 체육관 한쪽을 빌려 쓰는 발레 교습반 선생님에게 열쇠를 전해주라는 심부름을 시킨 거죠. 하얀 발레복을 입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소녀들의 모습에 이상하게 눈길이 갑니다. 쭈뼛거리더니 어느새 발레 연습용 긴 선을 잡고 섭니다. 권투용 보호구와 글러브를 낀 채 잡은 발레봉의 곧은 선은 빌리가 새로운 세계의 첫 관문을 통과하도록 도와줍니다. 

춤을 좋아하는 자신이 ‘호모일까’ 불안해하면서도 글러브와 신발을 벗고 선생님이 던져준 여자용 발레 슈즈를 신습니다. 기존 관념과 전혀 다른 삶에 입문한 빌리 모습에서 변형의 문을 통과하는 주제를 다룬 수메르 신화의 이난나(Inanna) 여왕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여왕은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왕관, 목걸이, 보석, 금반지, 옷을 하나씩 벗어야 하죠.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이 이야기가 영웅이 자존심, 아름다움, 기존의 삶을 팽개치면 두려운 대상에 복종하면서 그 대상과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현 관념을 버리고 버리면 비로소 새로운 것을 얻게 되는 이치를 알았던 걸까요. 아빠로부터 받은 권투 교습비 50펜스가 발레 선생님의 손에 들어가는 동안 빌리는 점점 더 깊이 발레에 빠져듭니다.


자기를 만나는 침묵의 공간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빌리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본 발레 선생님이 국립발레학교에 지원해보라고 권하면서 두 사람은 비밀리에 개인 교습을 시작합니다. 내면의 끌림을 따라가는 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넘어야 할 관문이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스스로 선택해 사각형 안으로 들어갑니다. 탄광 파업에 따른 아빠와 형의 갈등 속에서 발레 훈련 또한 강도 높게 이어지자 빌리의 스트레스가 증가해갑니다. 사각의 링에서 연습하던 빌리는 “못해요!”라고 외친 뒤 더 좁은 사각형, 탈의실로 도망칩니다. 선생님과 충분히 마음을 풀고 다시 사각의 링으로 돌아와 사각형 거울을 마주 보며 담담히 연습합니다. 

‘도형, 그림의 심리학’에 의하면 피라미드 같은 성스러운 건축물과 만다라 같은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는 이미지에 사용된 정사각형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사계절을 경험해야 한 해를 알게 되듯이, 정사각형의 4개 모서리는 각각 세상을 보는 관점을 제공하며 그것이 모두 통합될 때, 즉 모서리를 극복할 때 자기실현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입니다. 스스로 들어간 사각형에서 시련을 견뎌냅니다. 기존 고정관념을 상징하던 사각의 링은 완전한 재탄생의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빌리가 그리는 선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사진 제공·네이버 영화]

몇 번의 사각형을 거쳐 국립발레학교 오디션을 보러 갑니다.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춤추는 빌리의 모습에 당황해하던 심사위원이 춤출 때 느낌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든 게 잊혀요. 전류를 타고 새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 같아요.” 시간이 흘러 뛰어난 발레리노로 성장한 빌리가 무대 위로 힘차게 날아오르죠. 더는 사각형과 선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육체가 그리는 아름다운 선, 사각형을 견디고 지나온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집니다. 

캠벨의 책 ‘신화의 힘’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잘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이 나오면 누가 뭐라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됩니다.’ 

하찮은 존재라 여기는 내 안의 목소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면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작은 사각형 의자에 앉아 끊임없이 ‘무언가’에 몰두하는 지금, 자신만의 선을 그릴 자유를 창조하는 시간입니다.




입력 2018-01-09 13:27:37

  • | 신연우 아트라이터 dal_roa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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