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미우리가 센트럴리그 소속인 데 반해, 오릭스는 퍼시픽리그 소속이다. 오릭스는 통산 12번의 퍼시픽리그 우승과 4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2000년대 들어 6차례나 리그 꼴찌를 기록했고, 올 시즌에도 69승 71패로 리그 6개 팀 중 5위에 머물렀다. 5할 승률에 ‘-2’를 기록하고도 5위에 그쳤을 정도로 퍼시픽리그 구단들의 전력 차이는 크지 않다. 오릭스가 이승엽을 ‘우승 청부사’로 영입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최고 스타’로서의 상품성 여전
더구나 그동안 오릭스 타선의 핵이었던 베네수엘라 출신 용병 카브레라가 올 시즌을 마치고 팀을 떠났다. 2008년 세이부에서 오릭스로 이적한 카브레라는 이승엽과 같은 포지션인 1루를 보며 2010시즌 타율 0.331에 24홈런을 기록했다. 오릭스는 이승엽이 카브레라를 대신해주기를 기대한다. 이승엽은 T-오카다, 아롬 바르디리스와 중심 타선을 이룰 가능성이 크다.
오릭스가 이승엽을 영입한 것은 그의 풍부한 경험과 검증된 실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프로구단은 새 용병보다 이미 일본 무대를 경험한 ‘구관’을 찾는 경우가 많다. 일본 무대 적응이 그만큼 쉽지 않아서다. 이승엽은 수년간 이렇다 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오릭스와 같은 리그인 지바 롯데에서 2년간 뛴 경험이 있고 2005년부터 3년간 해마다 30홈런 이상을 때렸다. 그만큼 ‘검증된 용병’이다. 출장 기회만 보장됐다면 올 시즌처럼 1할대 타율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이승엽 영입의 결정적인 요인은 ‘한국 최고 스타’로서의 상품성이다. 이승엽을 통해 마케팅 효과를 누리겠다는 오릭스의 계산이 포함돼 있다. 오릭스는 간사이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오사카를 연고로 한다. 오사카를 포함한 간사이 지방에는 일본 내에서 재일교포가 가장 많이 산다. 오릭스가 이승엽을 영입한 뒤 특별히 “오사카 팬들이 이승엽 선수의 입단을 몹시 기대한다. 큰 환영을 받을 것이다”라고 강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오릭스는 한때 요미우리의 연고지 도쿄에서 불었던 ‘이승엽 바람’이 오사카에서 재현되기를 바란다.
의도적인 ‘이승엽 띄우기’도 이런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계약 발표와 함께 홈페이지에 한글 환영 문구를 넣은 오릭스는 12월 10일 서울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이승엽의 입단 기념 공식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지바 롯데도 지난해 김태균을 영입하며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용병 선수를 영입하면서 해당 선수의 나라에서 기자회견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어 오사카에서 일본 언론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입단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오릭스는 출장 기회 많은 팀
‘오릭스맨’이 된 이승엽이 12월 10일 서울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릭스 무라야마 본부장(오른쪽), 로버트슨 고문과 손을 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더욱이 이승엽이 가진 스타성을 기반으로 TV 중계권까지 한국에 팔게 될 경우, 오릭스가 이승엽을 통해 얻는 소득은 그에게 지급할 연봉을 쉽게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올해 SBS가 손을 뗐지만 요미우리는 지난해까지 3년 동안 이승엽에게 들어간 거액의 연봉을 한국에서 받은 방송 중계권료로 상당 부분 상쇄했다. 오릭스 역시 잘하면 이승엽을 통해 1년에 수십억 원대의 가욋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오릭스가 ‘많이 받아도 연봉 1억 엔은 힘들다’는 시장 평가보다 훨씬 많은 돈을 안기면서 이승엽을 영입한 데는 여러 속내가 포함된 것이다.
이처럼 오릭스가 이승엽을 영입한 데는 많은 계산이 있었지만 이승엽이 오릭스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명예 회복을 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올 시즌 중반 이후, 일찌감치 요미우리와의 이별을 예감한 이승엽은 한국 복귀가 아닌 일본 잔류로 자존심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돈에 연연하지 않겠다. 출장 기회가 많은 팀이라면 어디라도 좋다”고 말하며 무엇보다 1군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갖길 염원했다.
2010년 하라 감독의 눈 밖에 난 이승엽은 대부분 시간을 1군이 아닌 2군에서 보냈다. 이승엽이 2년간 뛰었던 지바 롯데에서 요미우리로 옮긴 가장 큰 이유도 ‘플래툰 시스템’에서 뛰기보다 꾸준한 출장 기회를 갖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승엽은 올 시즌 줄곧 2군에 머물며 정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면 이승엽은 왜 하라 감독의 눈 밖에 난 것일까. 이승엽이 어느 정도 인정했다시피 실력으로 자신을 어필하지 못한 잘못도 있지만 구단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이승엽 밀어내기’를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일본 야구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올 스프링캠프 때 주간훈련을 끝낸 이승엽이 두산 캠프에서 야간훈련을 한 게 눈 밖에 난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대타나 대수비로 자신의 기량을 보인다는 건 한계가 있게 마련. 이승엽은 최근 수년간 요미우리에서 갖지 못한 기회를 오릭스에서 바라고 있다.
요미우리와 결별해 새 둥지를 찾던 이승엽의 머릿속에 처음부터 오릭스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포지션에 탁월한 용병 카브레라가 버티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운 좋게 카브레라가 팀을 떠나고 오릭스가 그 빈자리를 이승엽으로 채우려고 하면서 ‘오릭스맨 이승엽’이 탄생했다.
이승엽은 12월 13일부터 삼성 라이온즈 경산 훈련장에서 본격적인 담금질에 들어갔다. 그동안 오프시즌이면 개인 훈련을 하던 스타일을 과감히 버리고, 삼성의 양해를 구한 뒤 옛 동료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삼성에서 지바 롯데로 이적을 결심한 2003년 말, 모양새가 좋지 않게 헤어진 이승엽과 삼성이기에 그가 경산에서 훈련한다는 것은 파격에 가까운 일이다. 그만큼 훈련과 부활에 대한 절실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또 겨울이면 웨이트 트레이닝에 중점을 뒀던 방식도 버리고 초반부터 기술 훈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11년이면 벌써 일본에 진출한 지 8년째다. 이승엽은 최정상의 자리에 있다 바닥까지 추락한 아픔을 겪으면서 누구보다 절실하게 명예회복을 다짐하고 있다. 그가 강조했듯, 2011시즌 성공은 그 자신에게 달렸다. 확실한 건 요미우리 시절보다 훨씬 좋은 여건에서 싸울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