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5일 2011년 정부 예산안을 심의 중인 국회 예결소위 여야 위원.
청와대와 한나라당을 향한 비판은 더욱 맹렬해졌다. 12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이 민주당 강기정 의원과 주먹을 주고받은 한나라당 김성회 의원에게 격려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지자 민주당 손학규 대표의 발언 수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천안에서 열린 ‘4대강 예산-날치기 MB 악법 무효화를 위한 대전충남 결의대회’에서 손 대표는 이 대통령을 직접 공격했다.
“12·8 예산안 날치기 본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시하고 배후 조종한 것이다. 이제 모든 의문이 풀린다. 왜 우리 야당 의원들이 밤을 새우며 새벽 5시 반까지 예산을 차곡차곡 착실히 심사했는데 갑자기 예산심의를 종결하고 본회의에서 처리한 것, 의문이 다 풀린다. 민주주의에 대해 정면 도전하는 이 대통령이 주도한 의회 쿠데타요, 궁중 쿠데타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날치기 용서 못해 vs 발목잡기 구태”
현재의 상황은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양쪽 모두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는 ‘치킨게임’을 연상시킨다. 도대체 왜 이처럼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초래된 것일까. 한나라당이 내년도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하기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예산안 심의를 위한 국회 예산결산특위 계수조정소위원회(이하 예결소위)가 정상적으로 열렸다. 12월 2일 시작한 예결소위 위원들은 연일 차수를 변경해 새벽 1~2시, 때론 새벽 5시를 넘기며 회의를 이어갔다. 7일 시작한 회의도 오후 6시 32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나라당 소속 이주영 예결소위 위원장은 2시간쯤 후인 8시 30분에 속개하기로 하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이 위원장은 예정된 시간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결국 다음 날 오후 4시 50분, 한나라당은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겉으로 보기에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한나라당이 돌변한 것은 분명하다.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번 예산안 강행처리에 대한 비판여론이 적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한나라당이나 정부는 민주당 측에 책임을 돌린다. ‘고질적인 예산안 발목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배은희 대변인은 8일 “말로만 심사를 외치며, 사실상 예산안 심사를 지연시킨 민주당의 이중적 행태는 두고두고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갈등 구도는 결국 ‘발목잡기’와 ‘날치기’로 귀결된다. 예산안 ‘날치기’도 문제지만 ‘발목잡기’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과연 예결소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2월 2일부터 7일까지 6일간 예결소위 위원들은 국회 15개 상임위원회 소관 49개 부처 예산안 중 ‘삭감 의견’이 제기된 안건에 대해서만 심의했다. 그 결과 여야 위원들은 모두 1조2000억 원을 삭감하는 데 합의했다. 이는 당초 상정된 삭감 예산안 22조6700억여 원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 삭감 예산안은 대부분 보류되거나 철회됐다. 이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은 교묘히 ‘지역구 챙기기’에 동참했고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예산안에 대해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주고받았다. 대부분 ‘지역구 챙기기’와 무관치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이다. 이 사업은 광주광역시에 ‘아시아문화전당’을 건설하는 사업으로 문화부가 당초 책정한 예산은 496억 원이었다. 해당 상임위에서는 증액을 요구했지만, 사전검토 과정에서 감액해야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집행되지 않은 예산이 많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심의 과정에서 여야 위원들은 삭감안을 철회하고 잠시 ‘보류’했다. 회의록이 남는 공개회의가 아닌 비공개회의에서 다시 조율하기 위해서다. 당시 회의록 내용 중 일부다.
이종구 위원(한나라당·서울 강남구)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많아? 496억….”
노철래 위원(미래희망연대·비례대표) “광주?”
서갑원 위원(민주당·전남 순천) “5·18재단. 도청하고 다 연결돼 있는 것.”
김낙성 위원(자유선진당·대전) “나중에 증액할 때 대전 드라마센터 추진한 것 봐 가지고….”
권성동 위원(한나라당·강원도 강릉) “아시아문화중심도시가 뭐야, 이게? 광주 아니에요, 광주?”
내년도 정부 예산안은 여야 의원들의 난투극 속에서 12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종구 위원 “이거 일단 보류합시다. 그리고 그때 가서 얘기하고. 오늘은 우선 걸어놔야지….”
이주영 소위원장(경남 마산) “그래, 이것은 보류해.”
결국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사업 예산은 삭감되기는커녕 당초 예산보다 200억 원 가까이 늘어난 690여억 원이 됐고, 대전에 설립되는 ‘HD드라마타운 건립’ 예산도 10억 원이 새로 반영됐다.
노골적으로 지역구 챙기기
문화부의 ‘공공디자인 시범도시 지정사업’과 ‘부산국립극장 사업타당성 조사사업’도 마찬가지다. 당초 문화부에서 요구한 공공디자인 시범도시 지정사업 예산은 40억 원이다. 정부 스스로 올해보다 20억 원을 감액했지만 사전검토 과정에서 추가 감액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런데 예결소위 안건으로 올라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시범도시가 부산과 경북 안동, 경기 양평, 전북 익산, 충북 청주 등 전국에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 해당 지역구 의원들의 로비가 심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문화부 담당자도 이 같은 상황을 적절히 활용했다.
모철민 문화부 제1차관 “(공공디자인 시범도시 지정사업에 대해) 내년도 정부 예산을 올해 60억보다 20억 감액한 40억으로 편성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 감액 요구도 있지만 또 여러 위원님이 추가적으로 증액 요구도 많습니다.”
정범구 위원(민주당·충북 증평음성괴산음성) “이거는 보류합시다. 뭐 복잡하네. 감액 의견하고 증액하고….”
여상규 위원(한나라당·경남 남해) “서로 교차하니까 원안으로 가버리지요.”
이주영 소위원장 “원안.”
그러자 부산국립극장 사업타당성조사 사업 예산삭감안도 일사천리로 ‘(정부) 원안’을 유지한 채 통과됐다. 부산을 지역구로 둔 한나라당 이종혁 위원이 “원안 통과”를 부탁하자 민주당 정범구 위원이 “부산에도 하나 줍시다”라고 화답한 것.
이 덕분일까. 최종 확정된 공공디자인 시범도시 지정사업 예산도 총 50억 원으로 10억 원이 증액됐다. 하지만 이는 예결소위 비공개회의에서 여야 위원들이 합의한 것 같지는 않다. 이와 연계됐던 ‘부산영상센터’ 건립 예산이 당초 80억 원에서 154억 원으로 껑충 뛴 것을 감안하면, 한나라당이 일방적으로 조정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지역구를 챙긴 사례도 적지 않다. 88억 원의 예산이 배정된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 ‘접경권 자전거도로 네트워크 구축사업’에 대해 사업성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안건으로 올라오자, 강원도 강릉을 지역구로 둔 한나라당 권성동 위원은 대놓고 동료 의원들에게 예산안 삭감 철회를 부탁했다.
신상진 위원(한나라당·경기도 성남중원) “여기 수정 이유에 보면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치지 않아서 사업타당성에 대한 검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천지역 예도 있듯이, 물론 정부 지원이니까 사전조사를 다 하겠지만 사업타당성 조사나 이런 것이 안 돼 있고, 또 걱정이 접경지역이면 혹시 만들어놓고도 이용객이라든가 과연 실효성이 얼마나 있겠느냐 이런 데 대해서, 사업타당성이나 예비타당성 조사도 안 돼 있다는 것에 대한 걱정이 있네요.”
서울에서 열린 한 출판기념회에서 만나 이야기 중인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왼쪽)와 이상득 의원.
서갑원 위원 “이것이 강원도 사업입니까?”
이주영 소위원장 “원안 유지.”(“좋습니다”하는 위원 있음)
‘입법서비스 개선 및 법제연구’ 예산, ‘입법지원서비스 능력개발’ 예산 등 국회의원 자신들을 지원하는 관련 예산안 처리에서 여야 예결위원들은 손을 잡았다.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입법 활동을 위한 예산 삭감을 주장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임인규 국회사무처 사무차장 “(입법서비스 개선 및 법제연구 예산은) 지역의 입법수요 간담회 비용입니다. 법제실 소관 업무 부적절의 문제를 지적하시는데, 저희들로 봤을 때는 위원님들 법제 활동을 직접 지원하므로 법제실 소관으로 보기 때문에 이것은 인정해주시면 직접적으로 위원님들 활동을….”
서갑원 위원 “그러니까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 가서 민원, 그러니까 그 수요인들에게 공청회나 의견 수렴하는 비용이다, 이 말씀이시지요?”
이주영 소위원장 “원안 유지.”
‘4대강·형님’ 예산만 나오면 보류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서울시청 서울광장 농성에 이어 전국을 돌며 정부여당을 강하게 성토하고 있다.
4대강 관련 예산도 마찬가지다. 4대강 예산과 관련해 여야가 정면으로 대치하기 시작한 것은 12월 7일 자정을 조금 넘기면서다. 국토부 내년 예산삭감안에 대한 심의 도중 4대강 하천 준설과 보, 제방 보강 등에 관련한 예산삭감안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민주당 장병완 위원이 “드디어 이제 4대강의 몸통이 나오는데 사실상 국토부에서 직접 수행하느냐, 현재 수자원공사에서 하느냐 그 차이인데 기본적으로 같이 했기 때문에 이것을 병합해서 토론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고 제안하자, 이주영 소위원장이 이를 받아들여 여야 토론이 시작됐다. 하지만 새벽 2시 30분을 넘겨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또 ‘보류’로 처리됐다.
끝없이 쌓이기만 하는 ‘보류’ 안건들. “이날 오후까지 대부분의 삭감안은 처리됐지만 4대강 사업이나 ‘형님 예산’안 처리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당내 분위기였다”는 게 한나라당 한 예결위원의 전언이다. 이 예결위원은 “다음 날 예산안을 강행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특히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민주당 몫도 어느 정도 챙겨줬기 때문에 더는 밀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여야가 합의하지 못한 채 ‘보류’된 안건은 대부분 한나라당과 정부가 원하는 대로 처리됐다. 예결소위는 삭감안건을 처리한 뒤에는 삭감한 예산만큼을 다른 사업에 분배하는 절차를 밟는다. 민주당은 이 과정에 철저히 배제됐으니 억울할 법도 하다.
대화와 협상은 민주질서의 기본이다. 이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예산안 처리를 강행한 것은 분명 문제다. 하지만 법으로 정한 예산안 처리 시한까지 무시한 채 대화와 협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성이 떨어진다. 더욱이 국민을 위한 내년 한 해의 예산안을 짜는데 ‘4대강 반대’나 ‘형님 예산’ 이라는 이유로 특정 예산안을 집중적으로 거부하면서 이를 볼모로 지역 예산을 챙겼다면 이 또한 비판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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