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볼리바르(1783~1830). 국내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미에서는 국가, 화폐, 지형, 국제조약에 그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그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남미 5개국을 스페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시킨 독립영웅이다. 왕왕 미국 독립영웅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이 인물이 최근 해외 언론에 다시 거명되고 있다. 국제사회의 이단아 베네수엘라 대통령 유고 차베스가 그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유해 조사 작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볼리바르는 크레올, 즉 남미 스페인 식민지에 정착한 백인 후손으로 베네수엘라에서 최고 권세가에 속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대기는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성년으로 성장하기까지 첫 번째 시기는 개인적으로 불운한 때였다. 그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소유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채 10세가 되기 전에 부모를 여의고 외숙부의 후견 아래 성장했다. 1802년 학업을 위해 스페인에 체류하던 중 19세에 스페인 귀족의 딸과 결혼했으나, 사랑하는 아내는 1년도 못 돼 병사했다.
남미 5개국 스페인 식민 통치서 해방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성장기를 통해 벌써 미래에 혁명가이자 국가건설자로서 활동하는 데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로서 그의 교육을 담당한 로드리게스라는 인물은 루소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조실부모(早失父母)는 개인적으로 불행이었으나 그 덕택에 부모의 간섭 없이 자유분방하게 자라면서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하층계급과 어울리며 그들의 처지에 일찍 눈뜰 수 있었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은 뒤 떠난 유럽 여행에서 그는 프랑스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이 혁명사상을 전 대륙으로 전파하던 시대적 상황을 목격했다. 특히 볼리바르는 파리에서 로드리게스와 재회했는데, 그를 통해 로크, 스피노자,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 합리주의 사상가와 계몽철학자의 저술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 또 1806년 귀국길에 신생 독립국 미국을 방문하고 자유와 독립의 가치를 몸소 체험했다.
볼리바르의 생애에서 두 번째 시기는 1810년에서 1825년에 걸쳐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등 스페인 식민지를 차례로 해방시킨 때였다. ‘해방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던 이 시기에 그는 남미 대륙의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었고, 탁월한 군사전략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1810년부터 본격적으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을 이끈 볼리바르는 스페인군의 반격에 부딪혀 수차례 좌절을 거듭하면서 콜롬비아, 자메이카 등으로 피신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투쟁을 재개해 1818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안전과 독립을 위해서는 식민지 해방운동을 국가적 경계를 넘어 확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819년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콜롬비아를 해방시키고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1822년에는 에콰도르를 해방시켜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편입했다. 이후에도 볼리바르는 스페인 식민통치의 중심지였던 페루의 해방을 위해 투쟁을 지속했고, 1825년 남미 해방운동의 또 다른 영웅 산 마르틴의 협조를 얻어 마침내 페루 해방을 성취했다. 특히 그는 남부 알투 페루지역을 별개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켰는데, 이 공화국은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볼리비아라는 국명을 채택했다.
1825년 이후 생애 마지막 시기 동안 볼리바르는 독립에 이어 식민지 해방의 궁극적 과제인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매달렸다. 자신이 해방시킨 5개 공화국의 대통령을 겸직했던 볼리바르의 정치적 목표는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국가들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를 통합해 대(大)콜롬비아를 결성했고, 나아가 그것을 단순한 국가연합체가 아니라 종신 대통령이 통치하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대 콜롬비아의 결성은 궁극적으로 중남미, 나아가 미국까지 포함한 아메리카 전체의 통합을 희망했던 원대한 꿈의 일부였지만 현실적 필요성도 있었다. 독립을 무산시킬 수 있는 스페인의 위협에 맞서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려면 식민지 전체 차원에서의 단결과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볼리바르의 새로운 국가 건설 구상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전략적 고려의 산물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혔다. 그의 구상을 지지하는 이는 소수에 그쳤고 다수는 부정적이었다. 혁명 이념을 배신한 독재자라는 비난과 함께 정적과 반대세력의 모함, 반란, 심지어 암살 기도가 이어졌다. 그러자 20여 년간 전쟁터를 누비며 숱한 난관과 역경을 극복한 그도 지치고 절망에 빠졌다. 결국 1830년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콜롬비아 산타 마르타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결핵이 악화돼 사망했다. 독립투쟁과 달리 국가 건설의 과제는 볼리바르에게 성취와 영광보다 좌절과 불명예로 끝났다.
‘포퓰리스트’와는 거리 먼 인물
운명의 반전에도 정치적 목표와 이념에서 볼리바르는 일관성을 유지했다. 계몽사상의 영향 아래 식민지 해방에 헌신한 그는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로서 자유와 평등을 신봉했고, 그것을 독립운동의 이념적 토대로 삼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는 자유와 평등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고자 했다. 볼리바르에게 한계는 지역, 계급, 인종적으로 철저하게 분열된 남미 사회의 현실이었다. 크레올 엘리트는 독립투쟁의 와중에서도 분파주의에 빠졌고 혼혈인, 인디언, 흑인으로 구성된 다수 주민은 크레올의 지배를 원치 않아 식민해방운동에 저항하기도 했다. 교조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던 볼리바르는 유럽과 북미의 민주주의를 찬양했으나 남미 사회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민지가 독립한 뒤에도 민중이 정치적으로 성숙할 때까지는 강력한 리더십에 의한 후견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볼리바르에게 종신 대통령제, 일당국가의 구상은 자유라는 혁명 대의에서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질서와 안정 속에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혼란과 무질서를 피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길이었다.
말하자면 볼리바르는 특별히 범주화하기 어려운 대단히 독특한 인물이었다.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혁명가였으나 자유주의를 경멸했으며,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군국주의는 배척했으며, 공화주의자면서도 민중의 지배는 경계했다. 절대자유는 절대권력과 마찬가지로 타락하며, 전제정치에 대한 증오가 무정부주의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따라서 생존 시 볼리바르에 대해 존경과 사랑, 혐오와 적대감이 교차했던 것이나, 사후 볼리바르에 대한 기억이 영감과 동시에 논란과 갈등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후대 베네수엘라의 권력자들은 볼리바르의 유산을 자신의 입맛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집권과 동시에 기존의 베네수엘라 국명(國名)에 볼리바르의 이름을 덧붙이고, 근자에는 독살설을 규명한답시고 그의 유해를 끄집어낸 차베스는 볼리바르 숭배 현상의 계보를 잇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차베스가 아무리 우상화하고 동일시해도 볼리바르는 어떤 경우에도 차베스와 달리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볼리바르는 크레올, 즉 남미 스페인 식민지에 정착한 백인 후손으로 베네수엘라에서 최고 권세가에 속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대기는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성년으로 성장하기까지 첫 번째 시기는 개인적으로 불운한 때였다. 그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소유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채 10세가 되기 전에 부모를 여의고 외숙부의 후견 아래 성장했다. 1802년 학업을 위해 스페인에 체류하던 중 19세에 스페인 귀족의 딸과 결혼했으나, 사랑하는 아내는 1년도 못 돼 병사했다.
남미 5개국 스페인 식민 통치서 해방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성장기를 통해 벌써 미래에 혁명가이자 국가건설자로서 활동하는 데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어린 시절 가정교사로서 그의 교육을 담당한 로드리게스라는 인물은 루소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조실부모(早失父母)는 개인적으로 불행이었으나 그 덕택에 부모의 간섭 없이 자유분방하게 자라면서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하층계급과 어울리며 그들의 처지에 일찍 눈뜰 수 있었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은 뒤 떠난 유럽 여행에서 그는 프랑스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이 혁명사상을 전 대륙으로 전파하던 시대적 상황을 목격했다. 특히 볼리바르는 파리에서 로드리게스와 재회했는데, 그를 통해 로크, 스피노자,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 합리주의 사상가와 계몽철학자의 저술을 폭넓게 접할 수 있었다. 또 1806년 귀국길에 신생 독립국 미국을 방문하고 자유와 독립의 가치를 몸소 체험했다.
볼리바르의 생애에서 두 번째 시기는 1810년에서 1825년에 걸쳐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등 스페인 식민지를 차례로 해방시킨 때였다. ‘해방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던 이 시기에 그는 남미 대륙의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었고, 탁월한 군사전략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1810년부터 본격적으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운동을 이끈 볼리바르는 스페인군의 반격에 부딪혀 수차례 좌절을 거듭하면서 콜롬비아, 자메이카 등으로 피신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투쟁을 재개해 1818년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안전과 독립을 위해서는 식민지 해방운동을 국가적 경계를 넘어 확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819년 험준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콜롬비아를 해방시키고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1822년에는 에콰도르를 해방시켜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편입했다. 이후에도 볼리바르는 스페인 식민통치의 중심지였던 페루의 해방을 위해 투쟁을 지속했고, 1825년 남미 해방운동의 또 다른 영웅 산 마르틴의 협조를 얻어 마침내 페루 해방을 성취했다. 특히 그는 남부 알투 페루지역을 별개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켰는데, 이 공화국은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볼리비아라는 국명을 채택했다.
1825년 이후 생애 마지막 시기 동안 볼리바르는 독립에 이어 식민지 해방의 궁극적 과제인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매달렸다. 자신이 해방시킨 5개 공화국의 대통령을 겸직했던 볼리바르의 정치적 목표는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국가들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를 통합해 대(大)콜롬비아를 결성했고, 나아가 그것을 단순한 국가연합체가 아니라 종신 대통령이 통치하는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대 콜롬비아의 결성은 궁극적으로 중남미, 나아가 미국까지 포함한 아메리카 전체의 통합을 희망했던 원대한 꿈의 일부였지만 현실적 필요성도 있었다. 독립을 무산시킬 수 있는 스페인의 위협에 맞서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려면 식민지 전체 차원에서의 단결과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볼리바르의 새로운 국가 건설 구상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전략적 고려의 산물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혔다. 그의 구상을 지지하는 이는 소수에 그쳤고 다수는 부정적이었다. 혁명 이념을 배신한 독재자라는 비난과 함께 정적과 반대세력의 모함, 반란, 심지어 암살 기도가 이어졌다. 그러자 20여 년간 전쟁터를 누비며 숱한 난관과 역경을 극복한 그도 지치고 절망에 빠졌다. 결국 1830년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콜롬비아 산타 마르타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결핵이 악화돼 사망했다. 독립투쟁과 달리 국가 건설의 과제는 볼리바르에게 성취와 영광보다 좌절과 불명예로 끝났다.
‘포퓰리스트’와는 거리 먼 인물
운명의 반전에도 정치적 목표와 이념에서 볼리바르는 일관성을 유지했다. 계몽사상의 영향 아래 식민지 해방에 헌신한 그는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로서 자유와 평등을 신봉했고, 그것을 독립운동의 이념적 토대로 삼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는 자유와 평등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며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고자 했다. 볼리바르에게 한계는 지역, 계급, 인종적으로 철저하게 분열된 남미 사회의 현실이었다. 크레올 엘리트는 독립투쟁의 와중에서도 분파주의에 빠졌고 혼혈인, 인디언, 흑인으로 구성된 다수 주민은 크레올의 지배를 원치 않아 식민해방운동에 저항하기도 했다. 교조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던 볼리바르는 유럽과 북미의 민주주의를 찬양했으나 남미 사회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식민지가 독립한 뒤에도 민중이 정치적으로 성숙할 때까지는 강력한 리더십에 의한 후견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볼리바르에게 종신 대통령제, 일당국가의 구상은 자유라는 혁명 대의에서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질서와 안정 속에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혼란과 무질서를 피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길이었다.
말하자면 볼리바르는 특별히 범주화하기 어려운 대단히 독특한 인물이었다. 자유와 해방을 추구한 혁명가였으나 자유주의를 경멸했으며,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지만 군국주의는 배척했으며, 공화주의자면서도 민중의 지배는 경계했다. 절대자유는 절대권력과 마찬가지로 타락하며, 전제정치에 대한 증오가 무정부주의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따라서 생존 시 볼리바르에 대해 존경과 사랑, 혐오와 적대감이 교차했던 것이나, 사후 볼리바르에 대한 기억이 영감과 동시에 논란과 갈등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 후대 베네수엘라의 권력자들은 볼리바르의 유산을 자신의 입맛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집권과 동시에 기존의 베네수엘라 국명(國名)에 볼리바르의 이름을 덧붙이고, 근자에는 독살설을 규명한답시고 그의 유해를 끄집어낸 차베스는 볼리바르 숭배 현상의 계보를 잇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차베스가 아무리 우상화하고 동일시해도 볼리바르는 어떤 경우에도 차베스와 달리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