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으로 향하는 늦은 시간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뉴욕에 사는 그 친구는 울고 있었다. “많은 친구가 죽었다”고 했다.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기 힘들어 곤혹스러웠다.
이런 때 적절한 위로의 단어는 무엇일까? CNN 화면을 통해 밤새도록 본 그 자리의 그 사람처럼 그저 “Oh, my God!”만 찾으면 되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런 ‘미증유의 떼죽음’에 대한 위로의 단어가 없는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 말이 있음으로 해서 그런 단어를 자주 써야 할 일들이 더 생기면 곤란할 테니까.
친구는 한국에서 20년, 미국 시민으로 22년을 살았다. 그는 흔히 ‘마피아의 땅’으로 연상되고,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의 무대로 등장한 뉴욕 브루클린에서 살았으며, 그곳 검찰청에서 검사로 일했고,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 맨해튼의 록펠러 센터에 사무실을 두었다. 세계무역센터(WTC)에 친구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몇 년 전 친구와 기자는 맨해튼이 한눈에 보이는 ‘브루클린 하이츠’에서 세계무역센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제 쌍둥이 빌딩은 기념사진과 추억에만 등장하는 ‘허상의 존재’가 되었다. 빌딩이 수천 명의 희생자와 함께 사라지기 며칠 전 친구와 기자는 부시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 부시보다 훨씬 강경 노선을 견지하는 외교정책의 배경이며, 교토기후협약의 일방적 폐기와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에서의 대표단 철수 등의 오만함에 대해 진정으로 걱정했다. 우리 대화의 결론은 이랬다. “저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기자는 미국의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를 열렬히 지지하고 대통령 취임식에까지 참석한 연예인들이 브루스 윌리스, 아널드 슈워제너거, 실베스터 스탤론, 척 노리스 등 한결같이 근육질을 자랑하는 ‘마초맨’ 스타일의 액션 스타였고(또 한결같이 테러 영화에 등장한), 엘튼 존이나 잭 니콜슨, 팀 로빈스 같은 ‘먹물 취향’의 연예인이 그를 외면했다고 해서 낮추어 볼 생각은 전혀 없다. 배우 제임스 가너처럼 “사람들은 그에게 지적 능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독일 민사당 논평처럼 “원인 없는 결과 없다”고 이번 테러 사태의 원인이 부시 행정부에서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단정하고 싶지도 않다.
부시 행정부가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을 밀어붙인 것은 사실이고, 반감을 사기에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늘상 이런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부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테러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 행위다. 테러 주체의 ‘무한한 책임’도 희석할 수 없다.
그럼에도 ‘워싱턴 포스트’가 부시 취임식을 ‘내시빌 스타일’(부시 고향인 텍사스의 주도. 여기서는 ‘촌놈’이라는 뜻)이라 꼬집고, 엘튼 존이 “그(고어)의 경쟁자에게 투표한다면 이 나라가 암흑시대로 되돌아갈까 두렵다”고 말한 이유를 곱씹어볼 필요가 많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대선 당시 “만약 부시가 대통령이 된다면 분명히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고 장담한 미국의 네티즌도 있었다.
미국 ‘세계경찰’의 위력 과시 … 그 여파는 어떨까
부시 대통령은 상하 양원 연설을 통해 “모든 국가는 이제 우리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천명했다. 이런 부시에게서 영화 ‘다이하드’ 시리즈에 출연한 미국 최고의 흥행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맡은 존 매클레인 형사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기자만의 생각이었을까? 부시가 최고의 ‘흥행 대통령’(역대 최고인 90%의 지지율)으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존 매클레인 형사와 같은 ‘세계 경찰’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려 하고 있고, 그 여파로 세계가 ‘신냉전의 그늘’로 다시 돌입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일까?
기자는 이런 생각이 쓸데없는 기우이길 정말 원한다. 그러나 샐리그 해리슨 미 윌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테러 이후 미국은 ‘우리가 완전히 옳거나 아니면 그르거나’의 흑백논리에 휩싸여 있다. 미국 외교정책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면 애국자가 아닌 것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마치 광란의 매카시즘이 휩쓴 그 시절처럼.
증오와 저주에 가득 찬 미국의 외침은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로서는 가슴 절절히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존 매클레인 형사여, 이제 두 번 다시 냉전의 도래는 보고 싶지 않다. 냉전은 ‘과거의 일’로도 충분하다.
이런 때 적절한 위로의 단어는 무엇일까? CNN 화면을 통해 밤새도록 본 그 자리의 그 사람처럼 그저 “Oh, my God!”만 찾으면 되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런 ‘미증유의 떼죽음’에 대한 위로의 단어가 없는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 말이 있음으로 해서 그런 단어를 자주 써야 할 일들이 더 생기면 곤란할 테니까.
친구는 한국에서 20년, 미국 시민으로 22년을 살았다. 그는 흔히 ‘마피아의 땅’으로 연상되고,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의 무대로 등장한 뉴욕 브루클린에서 살았으며, 그곳 검찰청에서 검사로 일했고,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 맨해튼의 록펠러 센터에 사무실을 두었다. 세계무역센터(WTC)에 친구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몇 년 전 친구와 기자는 맨해튼이 한눈에 보이는 ‘브루클린 하이츠’에서 세계무역센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제 쌍둥이 빌딩은 기념사진과 추억에만 등장하는 ‘허상의 존재’가 되었다. 빌딩이 수천 명의 희생자와 함께 사라지기 며칠 전 친구와 기자는 부시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 부시보다 훨씬 강경 노선을 견지하는 외교정책의 배경이며, 교토기후협약의 일방적 폐기와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에서의 대표단 철수 등의 오만함에 대해 진정으로 걱정했다. 우리 대화의 결론은 이랬다. “저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기자는 미국의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를 열렬히 지지하고 대통령 취임식에까지 참석한 연예인들이 브루스 윌리스, 아널드 슈워제너거, 실베스터 스탤론, 척 노리스 등 한결같이 근육질을 자랑하는 ‘마초맨’ 스타일의 액션 스타였고(또 한결같이 테러 영화에 등장한), 엘튼 존이나 잭 니콜슨, 팀 로빈스 같은 ‘먹물 취향’의 연예인이 그를 외면했다고 해서 낮추어 볼 생각은 전혀 없다. 배우 제임스 가너처럼 “사람들은 그에게 지적 능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독일 민사당 논평처럼 “원인 없는 결과 없다”고 이번 테러 사태의 원인이 부시 행정부에서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단정하고 싶지도 않다.
부시 행정부가 일방주의적 외교정책을 밀어붙인 것은 사실이고, 반감을 사기에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늘상 이런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부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테러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 행위다. 테러 주체의 ‘무한한 책임’도 희석할 수 없다.
그럼에도 ‘워싱턴 포스트’가 부시 취임식을 ‘내시빌 스타일’(부시 고향인 텍사스의 주도. 여기서는 ‘촌놈’이라는 뜻)이라 꼬집고, 엘튼 존이 “그(고어)의 경쟁자에게 투표한다면 이 나라가 암흑시대로 되돌아갈까 두렵다”고 말한 이유를 곱씹어볼 필요가 많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대선 당시 “만약 부시가 대통령이 된다면 분명히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고 장담한 미국의 네티즌도 있었다.
미국 ‘세계경찰’의 위력 과시 … 그 여파는 어떨까
부시 대통령은 상하 양원 연설을 통해 “모든 국가는 이제 우리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천명했다. 이런 부시에게서 영화 ‘다이하드’ 시리즈에 출연한 미국 최고의 흥행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맡은 존 매클레인 형사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기자만의 생각이었을까? 부시가 최고의 ‘흥행 대통령’(역대 최고인 90%의 지지율)으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존 매클레인 형사와 같은 ‘세계 경찰’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려 하고 있고, 그 여파로 세계가 ‘신냉전의 그늘’로 다시 돌입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일까?
기자는 이런 생각이 쓸데없는 기우이길 정말 원한다. 그러나 샐리그 해리슨 미 윌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테러 이후 미국은 ‘우리가 완전히 옳거나 아니면 그르거나’의 흑백논리에 휩싸여 있다. 미국 외교정책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면 애국자가 아닌 것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마치 광란의 매카시즘이 휩쓴 그 시절처럼.
증오와 저주에 가득 찬 미국의 외침은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로서는 가슴 절절히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존 매클레인 형사여, 이제 두 번 다시 냉전의 도래는 보고 싶지 않다. 냉전은 ‘과거의 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