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스님은 철저한 비구였다. 비구가 무엇인가? 걸사(乞士)라는 말이다. ‘음식을 빌어먹는 수행자’라는 원래 의미가 있긴 하지만, 비구에게는 지켜야 할 5가지 덕이 있다. 재산을 모으지 않고 탁발을 통해 살아가야 하고, 번뇌망상에서 벗어나야 하며, 탐욕과 분노와 무지(無知)로 불타는 이 세상에서 해탈(解脫)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또 계율을 청정(淸淨)하게 지켜야 하며, 외도(外道)와 악마를 두렵게 해야 한다. 이러한 비구 본연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열반 이후 법정 스님의 유언과 가르침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자유인 꿈꾸며 입산 치열한 정진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라.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해달라.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
스님의 추상같은 당부 때문이었지만, 스님의 마지막 3일은 ‘장례’라는 말을 붙이기가 어색할 정도로 간소했다. 열반(涅槃)에 든 직후 길상사 행지실(行持室)에서 뵌 스님은 가사(袈裟) 한 장만 덮은 채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또 길상사를 나와 출가본사인 송광사로 마지막 여정을 떠날 때도 강원도 오두막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평상에 누운 채 가사 한 장을 이불 삼았을 뿐이다. 마치 갠지스 강에서 보았던, 아무것도 없이 세연(世緣)을 마치는 화장 직전의 인도인들처럼 말이다.
3월 13일에 진행된 다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계산 중턱에 마련된 송광사 전통다비장에서 스님을 맞이한 것은 한 무더기의 참나무뿐이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연화대(蓮花臺)와 꽃상여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리석은 일이었다. 법정 스님은 2만여 불자의 ‘나무아미타불’ 염불이 계속되는 가운데 “불길 속에서 스님이 남기신 참뜻은 연꽃처럼 피어날 것(火中生蓮)”처럼 그렇게 가셨다. 이렇듯 법정 스님의 열반은 ‘부처’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짚어볼 것이 있다. 법정 스님이 부처님처럼 살 수 있었던 원천이 과연 무엇이었느냐다. 스님의 출가와 수행 과정을 보면 이에 대한 힌트를 조금은 찾을 수 있다.
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는 승보종찰(僧寶宗刹)이다. 철저한 수행가풍으로 ‘스님사관학교’라 불리는 곳이다. “송광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 제대로 중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님은 대학 재학 중 ‘자유인’을 꿈꾸며 입산했다.
“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돼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과 같은 심경이었다.”
3월 13일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전남 순천시 송광사 인근 조계산 자락의 다비장에서 열렸다. 1만여 명의 추모객이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다.
1954년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당대의 선지식(善知識) 효봉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선(禪)·교(敎)·율(律)을 겸비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것은 법정 스님에게 큰 행운이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은 효봉 스님의 일대기를 직접 쓸 정도로 은사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다.
통영 미래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며 효봉 스님을 모신 법정 스님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거나 신도들이 보내온 공양(식사)을 소중히 다루지 않았을 때는 불호령이 떨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효봉 스님의 은사 또한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던 석두 스님이었다. 효봉 스님이 금강산으로 석두 스님을 찾아가 나눈 출가 법담(法談)은 아직도 후학들에게 회자될 정도다.
이렇게 보면 석두-효봉-법정으로 이어지는 법맥(法脈)이 만들어진다. 효봉 스님의 다른 제자로는 조계총림 송광사 초대 방장을 지낸 대선사(大禪師) 구산 스님, 출가했다가 세속으로 돌아온 시인 고은 씨,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을 지낸 박완일 법사 등이 있다.
법정 스님과 사제(師弟)이자 이제는 효봉 스님의 유일한 생존 상좌인 법흥 스님(조계총림 송광사 동당-부방장급의 큰스님)은 “1960년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법정 스님과 함께 정진했는데, 효봉 스님이 수시로 우리를 불러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물으셨다”고 전했다. 엉덩이에 진물이 나 방바닥에서 살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공부에만 매달렸던 효봉 스님 밑에서 한눈파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법정 스님은 이후 하동 쌍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 등 전국의 선원에서 화두와 씨름했다. 스님은 선원에서 정진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신도들에게 말하곤 했다. 특히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매일 아침 108배를 올리고 참선한 뒤 책을 볼 때면 수행의 맛이 다른 것이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치열한 정진 후에 나온 책이 바로 ‘무소유’다. ‘무소유’는 공(空), 무아(無我), 연기(緣起) 등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과 상통하는 말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이치와도 같다.
1980년대 초반 당시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선(禪) 수련회’를 법정 스님이 주관해 개최했다.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으면서 ‘선의 대중화’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박5일 일정으로 수련생들에게 108배와 참선을 하게 했는데, 1000여 명의 대중이 몰려왔다고 한다. 수련원장 직책을 내놓고 스님은 보조사상연구원장을 맡아 보조 지눌 스님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정립하는 데도 진력했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했던 법정 스님은 저서 ‘텅 빈 충만’을 통해 “선(禪)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정리했다. ‘선이란 무엇인가’에서 스님은 ‘임제록’ ‘유마경’ ‘육조단경’ ‘전등록’ 등 대표적인 선서(禪書)를 인용하며 달마, 혜능, 마조, 회양, 임제 같은 선사의 가르침을 정확하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스님은 “선은 가장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의 사상”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의 다비를 지켜본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원철 스님은 “스님은 평생을 부처님처럼 살았다. 웬만한 수행력으로 평생을 저렇듯 일관되게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입적 후 언론과 국민은 스님의 글재주(文才)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스님의 책이 절판될지에 대한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달을 보는 손가락에 집착하는 것에 불과하다. 스님은 ‘수행’이라는 체(體)에 ‘글’이라는 용(用)을 사용한 것뿐이다. 법정 스님이 정말로 승가와 불교계, 국민에게 남긴 가르침이 무엇인지, 이제 달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