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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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양김 시대’는 미완의 혁명

개화파 김옥균·김홍집 비극적 말로 … YS·DJ는 정권 획득, 현대사 견인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09-02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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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양김 시대’는 미완의 혁명

    100년 전 ‘양김’ 김옥균(왼쪽)과 김홍집은 근대화 과정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고 비극적 말로를 맞았다.

    1894년 갑오년은 한국 근대사에서 영원히 기억돼야 할 해다. 새해 벽두부터 동학농민전쟁의 서곡이라 부를 수 있는 고부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3월28일 일본 도쿄를 출발,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1823∼1901)을 만나기 위해 중국에 온 김옥균(金玉均·1851∼1894)이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洪鍾宇·1854∼?)의 총을 맞고 암살됐다. 상하이 미국 조계에 있는 동화양행(東和洋行) 객실에서였다.

    김옥균은 개화당의 주역으로 10년 전인 1884년 10월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무참히 끝나자 제물포항을 통해 몰래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6년 5월 통리군국사무아문 주사(主事) 지운영(池運永·1852∼1935)이 김옥균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일본은 한일 간 외교분규를 우려해 북태평양의 절해고도 오가사하라 섬에 김옥균을 유배시켰고, 1888년에는 북해도 삿포로로 추방해 연금생활로 몰아넣었다.

    그러던 중 일본의 박해를 피해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고 범의 새끼를 얻을 수 없다”라며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으나 43세의 나이로 여관방에서 죽었고, 그의 시신은 조선에 인도돼 한강 양화진에서 국적(國賊)으로 능지처참돼 조선 8도에 효시(梟示)됐다. 당시 유길준(兪吉濬·1856∼1914)은 “슬프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도 못한 채 비상한 죽음을 당했다(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라고 조문을 썼다. 분명 김옥균은 비범했으나 준비되지 않은 혁명가였기에 자신의 이상을 펼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2년 시차로 사망 … 근대화 뜻 못 펼쳐



    그리고 2년이 채 못 된 1896년 2월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성공하면서 그동안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내각’의 수반 김홍집(金弘集·1842∼1896)이 친일파로 몰려 광화문 앞에서 군중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김옥균과 김홍집은 100년 전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개화파였으나 임오군란을 계기로 개화 방법과 외교 노선을 둘러싸고 급진개화파(독립당, 개화당)와 온건개화파(사대당, 수구당)로 양분됐다.

    근대화 과정에서 김옥균과 김홍집 ‘양김(兩金)’은 이처럼 비극적 말로를 맞았다. 물론 또 다른 개화파로 일제강점기까지 산 김윤식(金允植·1835∼1922)을 포함하면 ‘3김’씨가 되겠지만 역시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은 김옥균과 김홍집 ‘양김’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한국 현대사에도 양김이 나타났다.

    다만 그들은 이 땅의 최고지도자에 올랐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朴正熙·1917∼1979)에 이어 민주화를 이끈 김대중(金大中·DJ, 1924∼2009)과 김영삼(金泳三·YS, 1927∼ )이 그들인데, 이 현대사의 ‘양김’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양분돼 현대 정치판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섬 출신의 바다 사나이로 DJ는 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떨어진 하의도에서 태어났고, YS는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태어났다.

    YS는 14대 대통령으로 문민정부를 열어 신한국 창조, 세계화 정책, 금융실명제 등의 업적을 남겼고 DJ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며 15대 대통령에 당선돼 제2의 건국운동, 햇볕정책,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등의 족적을 남겼다.

    100년 전 ‘양김 시대’는 미완의 혁명

    100년 뒤 ‘양김’은 각각 14, 15대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현대사를 이끌었다. 1987년 10월13일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왼쪽부터)가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인촌상 제정 축하 리셉션에서 만나 얘기하고 있다.

    DJ가 8월18일 85세를 일기로 서거하면서 현대사의 ‘양김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평소 열렬한 의회주의자였던 그의 유지를 받들어 8월23일 국회에서 영결식을 치르고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을 신봉했던 그는 6년여의 옥중생활과 55차례의 가택연금,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4수(修) 끝에 대통령에 당선돼 남북정상회담을 이끌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DJ는 1970년대에는 박정희와 정적으로 살았고, 1980년대 이후에는 YS와 라이벌로 살았다. 1980년대는 김종필(金鍾泌·1926∼ )을 포함해 ‘3김’씨가 한국 정치사를 이끌었지만 역시 주역은 ‘양김’이었다.

    당시 ‘뉴스위크’가 ‘3김’씨를 특집으로 다뤘는데 ‘첫 번째 김씨는 다소 무능하고, 두 번째 김씨는 너무 과격하고, 세 번째 김씨는 때 묻었다(The first Kim(Young Sam) is less capable, the second Kim(Dae Joong) is too radical, and the third Kim(Jong Pil)is tainted)’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이 아이러니하게 100년 전 근대의 김홍집, 김옥균, 김윤식 3김씨에 비견되기도 해 흥미롭다.

    “YS는 무능, DJ는 급진, JP는 때 묻어”

    DJ가 민주화 투쟁을 이끌고 청와대에 입성하기까지 여러 사람의 후원이 있었겠지만, 대구 출신으로 40년 가까이 백악관 출입기자를 지낸 문명자(Julie Moon·1930∼2008) 씨의 도움도 컸다. 문씨는 19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영·호남 대립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호남 대통령’을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10년 넘게 교유한 박정희·육영수 부부와의 인연을 끊고 이희호 여사와 닉슨 대통령의 부인 패트리셔 닉슨과의 백악관 면담을 주선했으며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를 파헤쳤다.

    그런 문씨가 쓴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년 말 출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DJ가 정치지도자로 탄생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눈물겹게 보여준다. “지난 시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모든 사람들은 그를 지켜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싸운 것은 자연인 김대중의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워싱턴의 전화선으로는 무려 99가지 언어가 구사된다고 한다. 이처럼 복잡한 나라인 미국 워싱턴에서 코리아의 민주화를 외칠 때 우리가 김대중이란 이름을 앞세웠던 것은 그 이름 석 자가 바로 한국 민주주의의 수난을 상징하는 기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의 자리 또한 그의 것만은 아니다….”

    DJ가 서거하기 며칠 전 그와 평생의 라이벌이던 YS는 병원을 찾아 “우리 둘은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한 관계”라며 화해를 했고 국장 기간에는 자택 대문에 조기를 게양해 애도를 표시했다. 또 DJ가 떠난 빈자리를 위로하며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를 아울러 만찬을 주선하려 한다. 용서와 화해로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국론통일을 갈망했던 DJ의 염원은 그의 서거로 박씨를 물고 온 제비처럼 동서화합과 남북화합의 물꼬를 트고 있다.

    여야는 상생의 정치를 논의하고 북한은 처음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통령’ 호칭을 붙이며 남북정상회담 카드를 타진했다. 실로 오랜만에 한반도 전체에 평화가 오는 듯하다. DJ는 1월14일자 마지막 일기에서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라고 자신의 삶을 반추했다. 이제 그는 갔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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