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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火病)’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반응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분노다. 해결되지 않은 화와 함께 억울함, 가슴 답답함, 뭔가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고 불면증, 소화불량, 열감 같은 각종 신체적 증상은 물론 불안과 우울감 등이 혼재돼 나타난다. 화병은 사실 정신질환의 국제 분류에서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진단 기준은 아니지만, 나라별로 고유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증후군 가운데 하나로 일종의 부록 같은 항목에 기술돼 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진단 기준이 명확지 않으나 △‘가슴 답답함’ ‘열감’ ‘치밀어 오름’ ‘목이나 명치에 덩어리가 뭉친 느낌’ 중 3개 이상 △‘억울하고 분한 감정’ ‘마음의 응어리’ 중 1개 이상 △‘입마름이나 목마름’ ‘두통이나 어지러움’ ‘불면’ ‘가슴 두근거림’ 중 2개 이상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거나 분노가 치밀어 오름’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거나 자신이 초라하고 불쌍하게 느껴짐’ ‘두렵거나 깜짝깜짝 놀람’ 중
2개 이상 등 이 4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해당되면 진단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증상들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전문병원을 찾을 것을 권한다. 임상적으로는 이러한 환자가 전문병원을 찾으면 대개 공황장애나 우울증, 급성 스트레스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범불안장애 등 좀 더 세분화된 진단을 내리게 된다. 최근 총선 이후 보이는 보수층의 집단 화병은 종래의 만성 화병과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기존 만성 화병은 시집살이를 호되게 겪은 노년 여성 등 주로 사회 약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수십 년간 스트레스가 누적돼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치료는 세분화된 진단에 맞춰 약물 치료나 상담 치료를 시행한다. 세간의 오해나 우려와는 정반대로, 진료과별로 보자면 요즘 정신건강의학과 약물만큼 안전한 약물도 드물다. 약물 치료를 한다고 상담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단시간 내 빠른 증상 조절이 필요한 경우 마음 깊이 들어가는 상담보다 약물을 이용한 증상 조절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내면의 상처나 트라우마가 오래되거나 깊은 경우 정신분석치료 같은 장기간의 상담이 필요하기도 하다.
병원 치료 외에 일상에서 관심을 돌릴 수 있는 뭔가를 찾는다면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 간단한 취미도 좋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운동도 권한다. 우리나라처럼 주위에 산이 많은 나라도 없으니 주말마다 등산하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심리적 측면에서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있는 이들의 불안과 좌절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노병은 다만 사라질 뿐이라 했던가. 하지만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다는 것, 그것만큼 긍정하기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내 젊음과 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것. 인생에서 이만한 상실도 없을 테다. 문제의 원인 가운데 일부가 내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부에서만 찾는다면 소위 ‘꼰대’나 ‘라테’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다. 나라와 사회, 후속 세대를 걱정하는 마음은 모두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마음이 내 안의 불안, 좌절과 충분히 구분되지 않고 훈계나 충고로 표출될 때, 또는 당사자들이 원치 않는 시점에 드러날 때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자칫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아집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나거나 충고하고 싶을 때 그 이면에 내 안의 어떤 상실감이 관련돼 있지는 않은지 한 번은 따져볼 일이다. 산업화 시대의 덕성이 ‘무조건 직진’이었다면, 이제는 다양한 계층이나 인간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도움이 될 테다.
벌써 5월이다. 결국 봄날은 간다. 달도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 진리는 간명하다.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생각보다 어려울 때가 많다. 게다가 이러한 수용 과정은 결과적으로 슬프다. 하지만 그 슬픔의 대가로 우리는 정신적 자유로움과 평온함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