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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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고막 애인’ [음담악담]

‘보는 음악’이 아니라 ‘듣는 음악’으로 승부하는 음원 강자들

  • 감직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20-04-29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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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헤이즈, 폴 킴, 볼빨간사춘기 [뉴스1, JTBC, 동아일보 김도균 기자]

    (왼쪽부터)헤이즈, 폴 킴, 볼빨간사춘기 [뉴스1, JTBC, 동아일보 김도균 기자]

    언제였던가. 에픽하이의 타블로와 인터뷰를 했다. 2010년 전후였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막 보급될 무렵이었다. 한국 음악시장 현황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눴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트렌드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가 유행하면 다 그리로 갔다, 또 뭐가 유행하면 또 그리로 가고.” 다른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쏠림 현상’이 대중음악시장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음원 강자’ 시대

    유재하 [킹핀엔터테인먼트]

    유재하 [킹핀엔터테인먼트]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지금도 그의 말은 유효한가. 꼭 그렇다고 얘기하기는 힘들다. 케이팝(K-pop) 시대가 열리면서 아이돌은 ‘내수’에서 ‘수출’ 산업이 됐다. 한정된 자원과 시간을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투자해야 한다. 아이돌이 장악하던 국내 시장에 일정 정도 공백이 발생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공백을 싫어한다. 누군가 공백을 채워야 한다. 미디어와 플랫폼이 다양화하면서 각 포맷에 맞는 형태의 시장 지배자가 서서히 등장했다.

    케이블과 종합편성채널(종편)로 대변되는 레거시 미디어, 모바일 시대와 함께 자리 잡은 유튜브 같은 뉴 미디어, 그리고 1인 1스트리밍 아이디 보유 시대 음원사이트가 결과적으로 한국 음악 산업의 구조를 다변화했다. 그것이 의도됐건, 환경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건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됐다. 타블로의 진단은 시효가 지났다고. 다양성 또는 파편화, 한국 음악시장의 현재를 보여주는 키워드다.

    트로트붐, 뉴트로의 등장 등 그때그때마다 이슈가 부각되고 거론되지만 유행과 상관없이 조용히 음악계에 자리 잡은 흐름이 있다. 이른바 ‘음원 강자’다. 케이팝 아이돌이 아님에도,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깜짝 화제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신곡을 내면 최상위권에 오르는 이름이 있다. 내는 곡마다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가 되는 뮤지션이 있다. 헤이즈, 볼빨간사춘기, 폴 킴 등이다.

    오래전부터 지적돼온 한국 음악시장의 문제점은 빌보드와 오리콘 같은 공신력 있는 차트의 부재다. 음악시장 흐름이 단선적이던 과거에는 ‘가요톱10’ 등 가요 순위 프로그램으로 대중의 선호도를 측정할 수 있었다.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음악 풀 자체가 적었기에 순위 프로그램 내 차트는 대중의 선호를 비교적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음악방송이 TV 주류에서 밀려나고 음원이 음악시장을 대체하자 공식 차트의 부재가 문제가 됐다. 특정 음원 사이트 이용자를 대상으로 집계하는 차트에 의존하게 되면서 팬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순위를 결정하게 됐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실시간 차트 1위로 만들기 위한 팬덤의 스트리밍 총공세, 즉 ‘총공’이 차트를 좌지우지했다. 자발적으로 순위를 올려줄 두터운 팬덤이 없는 뮤지션에게 차트는 ‘그들만의 놀이터’였다. 음원 사이트 이용자가 대부분 차트를 바탕으로 음악을 듣는 국내 현실에서 팬덤이 강하지 않은 가수는 점점 설자리를 잃어갔다.

    팬덤형 vs 대중형

    김광석 [뉴시스]

    김광석 [뉴시스]

    그런 이들을 위해 어둠의 시장이 열렸다. 매크로 조작을 통해 차트 순위를 올려주는 사재기 업자가 등장했다. ‘스밍 총공 vs 사재기’는 이후 음원 차트의 구도가 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차트에 대한 강력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유명하지 않은 가수가 높은 순위에 오르면 사재기부터 의심하는 풍토가 생겼다. 그 어느 나라보다 차트에 의존하면서 그 어느 나라보다 차트를 믿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의 풍경이다.

    한국 음악 소비자는 차트에서 높은 성적을 찍는 뮤지션을 팬덤형과 대중형으로 나눈다. 앞서 말한 케이팝 아이돌이 팬덤형, 활동 여부와 상관없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음원 강자가 대중형이다. 음원 강자의 음악적 공통점은 발라드나 어쿠스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하며, 보컬 음색에 강점이 있다는 것이다. ‘보는 음악’이 아닌 ‘듣는 음악’을 대표한다.

    또한 어떤 음악을 좋아하건 그들의 차트 성적에는 시비가 붙지 않는다. 그들을 일컫는 수식어 중 ‘고막 애인’이라는 표현이 이를 잘 대변한다. 이는 그들이 계승하는 음악 소비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과거 TV와 라디오로 음악시장 구도가 양분됐을 때 TV보다 라디오를 기반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은 뮤지션이 있었다. 유재하와 이문세가 심야 FM 전파를 타고 청춘의 영웅이 된 1980년대, 이승환과 유희열이 TV 출연 없이 앨범 수십만 장을 팔았던 199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를 이끌던 이들은 21세기 들어 라디오 패러다임이 음악에서 수다로 바뀌면서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인터넷 보급은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의 주 타깃이던 젊은 층의 관심을 분산했다. 또한 음반시장이 쇠퇴한 반면, 음원은 아직 완전한 시장화를 마치지 못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싸이월드의 BGM(배경음악), 휴대전화 컬러링과 벨소리가 음원시장의 초기 형태였다. CD라는 음원 저장매체는 MP3에 자리를 빼앗겼지만, 음악 파일은 정식 시장이 아닌 P2P(peer to peer)를 통해 불법 다운로드하는 게 당연시되던 시절이다. 시장이 없으니 스타도 나오지 못했다.

    모바일-스트리밍-소셜미디어

    이문세 [SBS]

    이문세 [SBS]

    변화는 모바일과 함께 시작됐다. 2010년대 스마트폰 보급으로 대중의 음악 소비는 다운로드에서 스트리밍으로 넘어갔다. 비로소 음원시장으로 불릴 만한 규모가 형성됐다. 스트리밍이 완전히 정착된 2010년대 중반부터 절대 음원 강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5년 데뷔해 서서히 지명도를 올리다 2016년 ‘돌아오지 마’ ‘저 별’ 같은 노래로 차트 정상을 차지한 헤이즈, 같은 해 ‘우주를 줄게’로 역주행 끝에 결국 1위에 오른 볼빨간사춘기가 자리 잡은 시기다.

    그들의 성공은 소셜미디어의 입소문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심야 FM에서 이문세, 김광석의 신곡이 나오면 다음 날 학교 교실마다 “그 노래 들어봤어?”라는 말로 가득하던 과거 모습을 연상케 한다. 오직 멜로디와 가사, 보컬 목소리만으로 사람들의 ‘듣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는 노래들이 그 대상이었다.

    라디오 시대가 끝났다고 하지만 라디오를 통해 충족되던 수요는 끝나지 않았다. 플랫폼과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세대가 서태지와 아이들과 이승환을 다르게 추억하듯, 지금의 청춘 역시 훗날 방탄소년단(BTS)과 볼빨간사춘기를 구분해 기억할 것이다. 모든 세대는 그 세대의 고막 애인을 필요로 하는 법이니까.

    유희열 [KBS 제공]

    유희열 [K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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