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동도에 설치된 유인 등대. 안테나탑 뒤에는 헬기장이 있다.
주한 일본대사라면 관례상 주재국인 한국민의 정서는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알 것 다 아는’ 노련한 외교관인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는 외신기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3월9일에는 해상보안청(우리의 해양경찰청에 해당) 초계기가 독도 외곽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근처로 날아오기까지 했다.
지금 일본은 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올까. 표면적인 이유로는 올해가 시마네현 고시(告示)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한 지 100년이 된 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한국이 독도 실효 지배를 굳힐 수 있는 강한 ‘조르기’에 들어간 사실이 발견된다.
지금까지 독도 방위와 관련한 한국 측의 최대 고민은, 일본은 이지스 구축함과 조기경보기를 갖고 있으나 한국은 없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공군은 1999년부터 울릉도에 무려 500km까지 볼 수 있는 장거리 방공 레이더(FPS-117E1) 건설에 들어가 지난해 이를 가동시켰다. 이로써 독도를 포함한 전 동해상을 손금 보듯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 최근 공군이 일본 항공기의 독도 접근을 조기에 포착해 대응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952~54년까지 ‘말뚝 전쟁’
울릉도는 일본의 오키섬보다 독도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에(89km 대 158km), 설사 일본 항공자위대가 오키섬에 장거리 방공 레이더를 설치한다고 해도 한국 측은 불리하지 않다. 전문가들은 한국 측의 이러한 대비가 일본을 자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한국은 이지스 구축함과 조기경보기를 도입하지 않았다. 내실을 다질 때까지는 더욱 조용히 독도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조언했다.
500t급 해경함이 정박해 있는 독도의 부두. 이러한 시설이 건설될 때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은 한국이 6·25전쟁을 끝내기 전인 53년 5월부터 독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이로써 한국과 일본은 독도에 자기 영토임을 뜻하는 말뚝을 박는 치열한 ‘말뚝 전쟁’에 들어갔다(일본인의 독도 상륙은 주로 독도나 독도 근해에서 조업하던 어민들의 목격담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횟수 등이 정확하지 않다).
우리 측 자료에 따르면 어민들은 53년 5월28일 일본인 6명이 독도에 상륙한 것을 처음 목격했다. 그리고 6월25일과 27일, 7월1일에도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하거나 독도 근처에 나타난 것을 목격했는데, 6월27일 독도에 상륙한 일본인들은 앞뒤로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쓴 길이 230cm, 너비 15cm의 정사각형 모양의 나무말뚝(주간동아 467호에 보도한 한국산악회가 뽑아낸 나무말뚝과 흡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과 앞면에는 ‘주의: 일본 국민이 아니거나 정당한 수속을 밟지 않은 외국인은 (시마네현 인근 3해리까지인) 일본 영해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쓰고 뒷면에는 ‘주의: 다케시마(다케시마 연안 섬 포함) 주위 500m 이내 수역에는 제1종 공동어업권(해조류와 조개류)이 설정돼 있으므로 이를 무단 채취해가는 것을 금한다. 시마네현’이라고 쓴 게시판을 박아놓고 돌아갔다(관련 기사 66쪽).
일본인들은 말뚝을 박은 뒤 이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55년 한국 외무부가 발행한 ‘독도문제개론’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이러한 일본의 도발에 대해 한국 정부는 경북 경찰국을 시켜 7월3일 말뚝을 뽑아냈다고 한다.
수비대 상주 이후 우리 땅 확실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해 말뚝을 박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7월8일 국회는 한국산악회로 하여금 독도 현지조사를 하게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정부는 전쟁 중임에도 해군 군함을 독도로 파견했다(7월9일). 이해 9월17일 일본인들이 독도에 또 상륙한 것이 목격되었다. 그리고 10월15일 한국산악회가 독도에 들어가 말뚝을 뽑아내고 독도 일대를 측량하고 돌아왔는데, 25일 발행된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는 ‘다케시마에 일본령을 뜻하는 나무말뚝을 네 번째로 박았다’는 제목과 함께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지난 15일 한국 측은 다케시마에 ‘독도’라고 새긴 표석을 세우고 측량용 폴(pole) 일곱 개를 박아놓았다. 이에 마이쓰루(舞鶴)에 있는 제8관구 해상보안본부는 21일 밤 사카이(境)해상보안부 소속 ‘나가라’와 하마다(浜田)보안부 소속 ‘노시로’(모두 270t) 두 척의 순시선을 파견해, 이 섬에 네 번째로 ‘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라는 일본 영토 지명과 ‘한국민의 출어는 불법 어로입니다’라는 주의를 써놓은 표주(標柱) 두 개를 세웠다. 두 척의 순시선 승무원들은 22일 오전 8시 이 섬에 상륙해 한국 측이 설치한 독도 표석과 관측용 폴 6개를 뽑았다.”
아사히신문 보도대로라면 한국산악회가 뽑은 말뚝은 일본이 세 번째로 설치한 것이다. 지금도 울릉도에는 독도에서 뽑아온 일본 말뚝을 본 적이 있다고 하는 노인이 적지 않는데, 한국산악회가 뽑기 전에 있었던 두 개의 말뚝은 울릉군이나 울릉경찰서에서 뽑은 것으로 추정된다(이중 하나가 외무부에서 발행한 ‘독도문제개론’에 실려 있는 말뚝이다).
한국산악회가 다녀간 뒤 일본이 네 번째로 박았다는 말뚝은 누가 뽑았을까. 우리 측 증언에 따르면 54년 1월 말 경북경찰국이 독도에서 일본 영토 표지를 제거하고 한국 영토 표지를 설치했다고 하므로 이때 제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울릉도에 설치돼 2004년부터 가동에 들어간 장거리 방공 레이더 FPS-117(E)1.
한국산악회가 설치한 표석 제거 사실을 보도한 53년 10월25일자 아사히신문 기사.
그 후 정부는 54년 7월29일자 동아일보의 발의로 건설했던 독도 등대를 확대하고, 경찰 경비막사를 세웠으며, 500t급 함정이 접안할 수 있는 물양장(작은 부두)과 헬기 이·착륙장을 건설하였다. 공교롭게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부르짖은 것은, 한국이 독도에 시설물을 지을 때와 겹친다. 그러니까 역으로 판단하면 54년 이후 한국은 독도 실효 지배라는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고, 중간 중간 굳히기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시설물 공사를 펼쳤는데, 그때마다 일본은 비명을 지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