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년 우연히 싸움에 휩쓸려 시신경을 다쳤어요. 학창 시절 격투기를 즐겼을 만큼 활동적이던 제가 갑자기 눈이 멀어버렸으니 충격이 오죽했겠습니까. 몇 달을 술만 마시며 보냈죠.”
보다못한 동생이 그를 헬스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미칠 듯이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동안 몸 안 가득 쌓였던 분노와 상처가 조금씩 사라져가는 걸 느끼며 그는 달리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단다.
“그때부터 마라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탁 트인 길을 마음껏 달려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주최 측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그의 신청을 거절했다. 결국 이 씨는 동생 이름으로 대회에 참가, 타인의 발소리를 듣고 뛰는 ‘도둑달리기’를 감행했다. 결과는 완주 성공이었다.
“속도가 비슷한 사람 뒤에 바짝 붙어 뛰는 겁니다. 발 소리를 따라 뛰어야 코스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앞서 가는 선수가 ‘힘이 남았으면 앞질러 가지, 왜 뒤에 따라붙어 신경 쓰이게 하느냐’고 짜증을 내 ‘눈이 안 보여서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답하니 깜짝 놀라더군요.”
요즘 이 씨는 4월24일 중국 고비사막에서 열리는 ‘죽음의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다. 고비사막 마라톤은 6박7일 동안 식량과 텐트 등 15kg의 장비를 짊어지고 250km의 모래밭과 자갈밭, 고산지대 등 험난한 지형을 가로질러야 하는 대회. 신체가 건강한 사람도 완주를 장담할 수 없는 난코스지만, 이 씨는 자신 있다. 이 씨는 4월10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공원 일대에서 열리는 ‘2005 환경마라톤대회’에 출전해 ‘죽음의 마라톤’을 앞둔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