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에서 3관왕을 달성한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왼쪽)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뉴스1]
문제 핵심은 압박 전화 아닌, 사이버 폭력
도쿄올림픽 3관왕을 달성한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는 ‘쇼트커트’ 헤어스타일과 ‘웅앵웅’ ‘오조오억’ 같은 단어 사용을 빌미로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꼴페미’(꼴통+페미니스트)라며 공격받았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8월 3일 ‘양궁협회에 전화를 걸어 국가대표 자격 박탈을 요구한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을 들면서 안 선수를 향한 공격을 ‘헛것’으로 취급했다. ‘압박 전화’가 아니라 ‘사이버 폭력’이 문제가 돼 로이터·AFP통신도 이 일을 중대하게 보도했다. 국민의힘 양준우 대변인이 안 선수가 쓴 단어들을 ‘남혐(남성혐오) 단어’로 규정한 사실에 대해서도 이 대표는 “여성 혐오적 관점에서 이야기한 바가 없다”고 강변했다. 확전해놓고 ‘전화 여부’로 주제를 좁히는 데서, 허위인턴 문제를 세미나 참석 여부로 좁히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떠오를 정도다.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backlash: 반발)를 타고 부상한 정치인은 자신도 금세 반격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백래시를 등에 업고 당선했지만 취임 이튿날 ‘여성들의 행진(Women’s on March)’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300만 명의 시민과 마주했다. 힘을 가지자마자 과녁이 되는 건 ‘집권의 역설’이다.
국민의힘과 이 대표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후 이를 유의해야 했다. 출구조사 결과 20대 남성 투표자 넷 중 셋이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를 지지했다. 이는 ‘편향된 페미니즘에 궐기한 20대 남성의 승리’가 아니다. 선거의 주요 쟁점은 ‘정권심판’이었다. 20대 여성의 더불어민주당(민주당) 후보 지지율도 이전보다 떨어졌거니와, 민주당 후보가 남성이거나 국민의힘 후보가 여성이었다면 그보다 더 떨어졌을 테다. 박영선 후보가 전임 시장의 성폭력을 사과했고, 오 시장은 젠더 대결을 부추기는 선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간과해선 안 된다. ‘20대 남성 넷 중 셋’을 하나로 묶는 것도 상식적이지 못한 분석이다.
선거 당시 오 후보의 유세차를 이끈 이준석 뉴미디어본부장과 팬층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20대 남성의 불만이 정권 심판 열기와 오세훈의 승리로 이어졌다’는 식의 해석이 흘러넘쳤다. 이 대표가 6월 11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것도 비슷하게 간주됐다. 여권 신장에 관심이 높은 청년 여성을 향한 도발이다.
“국민의힘 싫어서라도 민주당 찍는다”
국민의힘에 대한 20대 여성의 반감이나 시큰둥함도 다시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18~29세 여성 364명을 대상으로 7월 27일부터 사흘간 자체 조사한 결과 7월(1~5주 통합) 이들의 국민의힘 지지율은 11%로 민주당(33%)에 크게 뒤졌다(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5.7%p. 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성폭력 심판’을 위해 야당 서울시장 후보를 지지했거나 이 대표 탄생을 ‘세대교체’ 차원에서 고평가한 여성이 적잖이 등을 돌린 듯하다.안티 페미니즘에 열중하는 정치인은 ‘20대 여성은 어차피 민주당 쪽으로 뭉치지 못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20대 여성의 국민의힘 지지율이 상당히 저하됐지만 민주당 지지율이 높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가 국민의힘을 못 찍을 줄 아는가”라며 정권 심판에 무게를 실어본 20대 여성조차 ‘국민의힘이 싫어서라도 민주당을 찍는다’로 쏠릴 수도 있다.
제3당 지지층도 변수다. 재보선 출구조사 결과 20대 여성의 15%가량이 제3후보에 투표했다. 이들 표심은 대선에서 상당수 거대 양당으로 흡수된다. 대선은 투표 한 번에 당락이 갈려 사표 심리가 깊다. 국민의힘이 청년 여성을 민주당으로 몰아버릴 개연성은 열려 있다.
“20대 여성이 등을 돌리더라도 더 많은 20대 남성을 규합하면 된다”는 착각도 버려야 한다. 20대 남성 중 거대 양당 모두를 지지하지 않는 층도 제법 두텁다. 이들은 젠더 문제만 고민하지 않는다. 안티 페미니즘 지향 여부와 무관하게 중요시하는 사안에 대한 국민의힘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표심은 민주당으로 기울 것이다. 내년 선거는 2002년 대선이나 2012년 대선처럼 50 대 50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티 페미니즘 전략이 고착화되면 외연 확장과 지지층 모두 놓친다.
정권교체에 성공해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미국 ‘여성들의 행진’보다 열기가 거셌던 사건이 한국에도 있었다. 2007년 대선에서 2위 후보의 1.86배를 득표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석 달이 지나지 않아 대규모 촛불시위와 직면했다. 정치인은 이기는 법 외에 ‘승자가 받는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일도 고심해야 한다.
이 대표는 그간 여성 차별 문제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이 여성 차별로 여겨지는 게 억울하다면 편견을 허물 만한 실천을 평소 축적해야 했다. 궁극적으로는 청년세대를 짓누르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깊이 있게 접근해야 한다. ‘누가 더 차별받느냐’를 두고 다툴 게 아니라 ‘해법이 무엇인가’를 놓고 경쟁할 때 시야가 넓어지고 질곡을 극복할 힘도 생긴다.
보편적 의제를 구체적 운동으로 소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령 ‘직장 내 괴롭힘’처럼 누구도 “문제없다”고 말할 수 없는 사안과 관련해 캠페인을 벌인다면 어떨까. 내담자나 동조자 가운데는 평소 욕했던 ‘페미’도 있을 텐데, 이들에게나 국민의힘에게는 기회가 될 것이다. 발언권과 리더십을 강화하는 열린 공간을 찾는 것은 정치권 전반이 나서야 할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