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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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보수, 태극기부대와 결별하고 공동체 가치 추구해야” [진중권의 직설 16]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입력2020-09-15 17: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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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간동아’는 진보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한국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담긴 기고문을 매주 화요일 오후, 온라인을 통해 공개한다. <편집자 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뉴스1]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뉴스1]

    최근 국민의힘은 당의 DNA를 바꾸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직접적인 계기는 4·15 총선에서의 참패였다. 코로나 사태의 영향도 있지만, 참패의 근본적 원인은 당이 탄핵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데에 있다. 참패 후 당은 부랴부랴 체질을 바꾸는 일에 나섰다. 그 덕에 지지율이 잠깐 여당을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보수진영에서 개최한 8·15 집회가 바이러스 확산의 기폭제가 되면서 오르던 지지율은 다시 큰 폭으로 떨어졌다. 그 후 보수진영 안에서도 이제 ‘아스팔트 보수’라 불리는 극우세력과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보수의 가치 논쟁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9월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9월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8·15 집회 이후 이제 적어도 극우세력과 결별해야 한다는 인식은 보수진영에서 거의 보편적 합의가 되어가고 있다. 이 변화는 10월 3일로 예정된 아스팔트 보수의 집회를 만류하는 당의 목소리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스팔트 보수와의 결별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그들을 만류하려고 그들이 개최하려는 개천절 집회를 3·1운동에 비유해 주었다가 구설에 올랐다. 한겨레신문에서는 사설로 그의 발언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의 발언에서 우리는 아스팔트 보수와 같이 갈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보수진영의 딜레마를 본다. 

    보수 언론의 엇갈리는 논조에서도 이 딜레마가 엿보인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보수의 중도확장 전략에 전반적으로 우호적이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당명 변경을 계기로 보수 야당은 극단세력과의 결별, 구태와의 단절을 통해 완전히 새로 태어나겠다는 각오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중앙일보 역시 “중요한 것은 보수가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름만 바꾸고 겉만 변하는 게 아니라 뼛속까지 국민만 생각하는 보수로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외부와 내부 필진의 논조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신문사 내부의 필진은 노선 전환에 부정적이다. 조선일보의 최보식 선임기자는 손익계산에서 불리하다고 태극기부대를 ‘손절매’하는 “우파정당의 비겁함”을 비판한다. 우파 정당의 위기는 “끝까지 싸워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를 잃어버린 데에 있다”는 것이다. “헌법 정신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 정체성과 관련된 쟁점 사안을 놓고 결코 밀려서는 안 된다는 패기가 없다. 공부가 안 돼 있거나 보수 가치에 자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광화문 집회 이후 통합당 지지율이 하락한 이유도 따로 있단다. “이런 얍삽한 모습이 보기 싫어 등 돌린 숫자도 꽤 많을 것이다.” 

    조선일보의 얼굴 김대중 전 고문은 반대를 전략적 차원까지 끌어 올린다. “보수가 좌 클릭한다고 해서 좌파를 이길 수 없다. 좌파 정치나 진보 정책은 좌파가 더 잘 알고 더 잘하기 때문에 보수가 몇 가지 비슷하게 좌파 흉내 낸다고 해서 좌파를 이길 수 없다. 오히려 좌파를 이념적으로 도와줄 뿐이다.” 그렇다면 보수의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 “국민적 선택과 시대적 흐름이 좌 성향일 때가 있고 그 흐름이 보수·우파로 이동할 때도 있다. 그것이 세계 정치 순환의 역사고 인류사의 흐름이다.” 즉 “시대적 흐름”이 바뀔 때까지 그냥 기다리자는 것이다.

    극우에서 공동체주의 보수로

    이들의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보수나 진보는 있어도 중도라는 이념은 없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중도층이라 불리는 이들은 사안에 따라 때로는 진보적 정책에, 때로는 보수적 정책에 표를 던지는 ‘스윙보터’일 뿐, 이들이 보수나 진보와 구별되는 별도의 이념을 가진 집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진보는 그동안 중도층을 잡겠다고 정책에서 우클릭을 했다가는 집토끼마저 잃는 우를 범해왔다. 하지만 위기일수록 진보는 외려 진보의 색채를 더 선명하게 해야 하고, 그래야 중도층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보수에서는 그 “가치와 이념”을 버리기는커녕 과도하게 내세워 왔다는 데에 있다. 그동안 보수는 민주당의 모든 정책에 “좌파” 딱지를 붙이고 오직 “체제”나 “정체성과 관련된 쟁점 사안”에만 집착해 왔다. 그 결정체가 아스팔트 위의 태극기 부대다. 그런데도 참패를 거듭한다면 애초에 진단이 잘못된 것이다. 진단이 잘못되니 처방도 잘못 나올 수밖에. 오류가 있으면 찾아 수정해야 하는데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그 모두를 “세계 정치의 순환”과 “인류사의 흐름”으로 돌리고 마냥 “시대적 흐름”이 바뀌기를 기다리자는 얘기밖에 못 하는 것이다. 

    줄곧 보수의 “가치”를 고집했는데도 패배를 거듭했다면, 그동안 보수의 정체성으로 알던 그 가치가 진정한 보수의 가치가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 보수 중 태극기 부대가 자기들을 대표한다고 보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아스팔트 위의 과격한 구호가 보수의 “이념”이며, 대형집회로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무책임한 행태가 보수의 “가치”일 리 없다. 그동안 보수는 민주당과 선명한 대립선을 긋기 위해 중도층이 받아들일 만한 정책에까지 무분별하게 ‘좌파’ 딱지를 붙여 왔다. 그러다가 극우로 치우쳐 결국 그 협소한 영역을 보수의 가치와 이념으로 착각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극우와 선을 긋는다고 보수의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다른 유형의 보수도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홍정욱 전 의원이 언론 인터뷰에서 그 ‘다른 유형’의 보수가 어떤 것인지 밝힌 바 있다. “보수 정당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기본소득제 같은 미래에 대한 준비, 또 기후변화, 환경문제, 한반도 평화체제 이런 건 반드시 가져가야 한다. 그런 부분을 등한시한 채 전통적인 보수와 진보 이념 가치를 고수하는 정당은 깨어있지 못한 정당이고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공동체주의 보수’라 부를 만한 입장이다.

    태도로서의 보수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공동체주의 보수’를 언급한 홍정욱 전 의원. [뉴스1]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공동체주의 보수’를 언급한 홍정욱 전 의원. [뉴스1]

    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의 문제는 보수 ‘정체성’을 특정한 ‘정책’과 혼동한다는 데에 있다. 바로 이것이 보수의 유연성을 제약한 나머지 보수가 중도층에게 소구력을 잃은 것이다. 현대정치에서 진보냐 보수냐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진보도 전통적으로 보수적이라 여겨지는 정책을 취할 수 있고, 보수도 전통적으로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정책을 취할 수 있다. 김영삼도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고, 노무현도 한미 FTA를 추진하고 이라크에 파병까지 하지 않았던가. 유럽의 보수정당들도 지금은 녹색당의 브랜드인 생태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영국 보수당의 당수인 퀸틴 호그는 1959년에 보수를 하나의 “태도”로 규정한 바 있다. 보수란 “인간 본성의 심원하고 영원한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보수층은 저학력·저소득층에 많다. 이들이 외려 초고학력·초고소득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이른바 ‘계급배반’ 투표를 하곤 한다. 그렇다고 이들 보수층이 1%의 초엘리트들의 선전에 속아서 그들에게 표를 주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따른 경제적 유불리가 아니라, 나름 자기가 상대보다 옳다는 윤리적·도덕적 확신에서 보수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보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그 윤리적·도덕적 확신이 약화된 것을 의미한다. 전장의 병사는 적보다 자신이 더 옳다는 확신이 있어야 제대로 싸운다. 떨어진 보수의 사기를 올리려면 한때 보수당에 표를 던지게 해주었던 그 도덕적 우월성을 회복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태도”로서 보수는 국가에 대한 충성, 가족에 대한 헌신, 공동체를 위한 봉사, 전통과 관습에 대한 존중 등을 의미한다. 이런 가치들을 지키는 데에는 ‘경직된’ 태도를 갖되, 정책에 관해서는 그때그때의 시대정신에 맞추어 ‘유연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 동안 보수는 이를 거꾸로 해 왔다.

    보수의 품격

    좋은 조짐도 보인다. 얼마 전 어느 여당 의원이 “야당엔 군대 안 갔다 온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런데 확인해 보니 병역면제 의원은 민주당 쪽(34명)이 국민의힘(12명)보다 훨씬 많았다. 병역을 면제받은 의원 2세 15명 중 무려 14명이 민주당 의원 자제들이었다. 신이 난 보수야당 의원들은 단톡방에 자신과 자식의 군 복무 사진을 올려 콘테스트를 벌였다. 이 문제에서는 보수야당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셈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병역의무다. ‘본인과 자식의 병역의무 이행이 공직의 전제조건’이라는 인식이 이제 보수의 상식이 되어야 한다. 

    보수라면 무엇보다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 과거에 보수당의 별명은 ‘성누리당’이었다. 하지만 최근 성추행 사건은 대부분 민주당 측에서 일으키고 있다. 보수라면 남의 집 귀한 딸에게 그런 짓 하는 것을 누구보다 혐오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한 헌신’은 보수 야당에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부는 존중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당에는 부동산부자들이 너무 많다. 보수라면 정당하게 획득한 부마저 공동체와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수 억, 수십 억의 불로소득을 거두고서 ‘세금폭탄’ 운운하며 조세저항이나 하는 것은 보수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보수는 ‘태도’의 이름이다. 가치에 관해서는 ‘고루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원칙을 고수하는 태도. 그러나 정책에 관해서는 “인간 본성의 영원한 요구”를 그때그때 시대적 정신과 사회적 과제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시키는 태도. 하지만 이제까지 보수는 정책에서는 경직되고, 가치에서는 자신에게 한 없이 너그럽기만 했다. 이를 뒤집어야 한다. 그래야 보수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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