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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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차원 뛰어넘어 파란만장한 민족 역사의 기록

[서평] 이정식 자서전: 만주 벌판의 소년 가장, 아이비리그 교수 되다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입력2020-09-19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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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동아일보]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동아일보]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구순을 맞아 파란만장하고도 영예로운 일생을 회상한 자서전을 출간했다. 이 책은 도미 유학길에 오르기까지와 그 후 삶으로 크게 나뉜다.

    첫 부분은 글자 그대로 다사다난한 세월에 우여곡절이 겹친 시기를 다뤘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1931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인 1934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으며, 거기서 중국 본토 한커우로 이주했다 평양으로 돌아왔고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자연히 일제의 중국 침략에 따른 중일전쟁, 그리고 일제의 진주만 침공에 따른 태평양전쟁을 겪어야 했다.

    만주 랴오양에서 일제의 패망을 목격한 그는 곧 소련군의 만주 진입, 그리고 소련군을 대체한 중국공산당 팔로군의 만주 점령을 겪었다. 중국공산당의 비호를 받아 옌안에서 성장한 조선의용군도 이때 만주에 들어왔는데, 그는 본의 아니게 조선의용군의 정치적 모체라 할 수 있는 조선독립동맹의 맹원이 됐다.

    그는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간 국공내전을 현장에서 체험하는 가운데 1946년 3월 아버지의 실종으로 처절한 궁핍을 겪어야 했다. 15세 소년가장으로 중국국민당 치하에서 의료원 조수와 면화공장 쿨리(苦力)로 일하며 가족 생계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됐다.

    모욕과 차별, 억압의 경험

    ‘이정식 자서전: 만주 벌판의 소년 가장, 
아이비리그 교수 되다’
이정식 / 일조각 / 384쪽 / 2만8000원

    ‘이정식 자서전: 만주 벌판의 소년 가장, 아이비리그 교수 되다’ 이정식 / 일조각 / 384쪽 / 2만8000원

    가족과 함께 1948년 3월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를 거쳐 평양에 도착한 그는 짧게나마 소련군의 점령통치를 경험했고, 1948년 9월 9일부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쌀장사로 소년가장 노릇을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김일성을 볼 수 있었다. 



    19세이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면서 북한군 징병을 피하고자 숨어 살다 유엔군의 반격에 따라 목숨을 건졌고, 이때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같은 해 12월 월남 후 국민방위군에서 복무한 데 이어 곧 미국 극동군총사령부 번역부(ADVATIS)에 ‘번역관’으로 채용돼 중공군 포로들의 심문통역을 맡은 가운데, 오늘날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 야간부를 다녔다. 번역관으로 일하면서 영어를 배웠고, 1954년 1월 도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관한 저자의 회상을 읽노라면 일제 통치 아래서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모욕과 차별, 그리고 억압의 실상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굶주림, 헐벗음, 강추위, 공산당 아래서 부자유와 생사가 오가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수없이 대하게 된다. 어린 소년이 감내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들이었다. 그것은 그 시절 우리 겨레의 대다수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고난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의 자서전을 쓴 셈이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저자의 학문 세계에 직접적이면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중국공산당 자체와 중국공산당 아래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전개했던 항일독립운동, 만주에서 다양하게 전개된 혁명운동, 그리고 조선공산주의운동에 대해 책과 논문을 썼다. 모두 만주와 북한에서의 체험에 자극받은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저자가 공산통치를 경험하면서 공산통치에 반감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중국공산당이건, 소련공산당이건, 북한공산당이건 공산통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람은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통치 아래서는 살 수 없다는 진리를 대학 과정을 밟지도 않은 10대 때 깨달았다.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가르침을 접한 그는 천성적인 자유주의자 또는 자유민주주의자여서 낭만적인 소년기나 청년기에 물들 수 있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그 후에도 ‘반공주의’로 일관한 건 아니다. 남한에서는 물론이고, 서방 학계 일각에서도 김일성을 ‘가짜 김일성’으로 매도하던 1960년대 그는 저술에서 김일성에 대해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게릴라운동에 참여한 ‘진짜 김일성’이라고 썼다. 

    저자는 언제나 학문적 엄격성을 유지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쟁쟁한 학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미국 정치학계에서 객관적인 학자로 평가받아, 미국 의회가 남한이나 북한에 대해 청문회를 열고 전문가 의견을 청취하고자 할 때 초청됐다.


    이 교수는 1974년 미국정치학회가 수여하는 최고 상인 우드로윌슨상을 공동수상했다. [동아일보]

    이 교수는 1974년 미국정치학회가 수여하는 최고 상인 우드로윌슨상을 공동수상했다. [동아일보]

    두 번째 시기는 1953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위치한 하일랜드칼리지 입학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곧 이 학교에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로 옮겨 정치학을 전공해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그가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에 주목한 로버트 스칼라피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B) 정치학과 교수의 연구조교로 발탁돼 조선=한국의 민족주의운동에 관한 논문을 완결, 30세 때인 1961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저자는 콜로라도대와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다트머스칼리지의 전임강사로 교직을 시작했으며 마침내 아이비리그 펜실베이니아대의 교수가 됐다. 박사학위를 발전시킨 ‘코리아 민족주의의 정치(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1963), ‘코리아에서의 공산주의(Communism in Korea)’ 1·2권(1974)을 모두 캘리포니아대 출판부에서 출간했다. 박사학위논문을 지도한 스칼라피노 교수와 공저한 책으로 1974년 미국정치학회가 수여하는 최고 상인 우드로윌슨상을 공동수상했다.

    저자는 ‘만주에서의 혁명적 투쟁(Revolutionary Struggle in Manchuria)’(캘리포니아대 출판부/ 1983)을 비롯해 여러 책을 냈다. ‘코리아의 공산주의자들과 예난’을 포함해 ‘북한에 있어서의 토지개혁, 집단화 그리고 농민’ ‘북한의 김일성’을 비롯한 수많은 논문을 계속해서 출간했다. 만년에는 경희대에서 석좌교수로 봉직하며 후학들을 키웠다.

    위에서 살펴본 두 번째 시기는 첫 번째 시기와 크게 대조된다. 학부 시절 학교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등 ‘고학’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중산층 가정의 미국인 대학생도 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그는 억압과 대조되는 자유를 빈곤의 땅이 아닌, 풍요로운 땅에서 만끽할 수 있었다.

    정직하게 과오 써내려간 삶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후학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준다. 한반도 문제를 볼 때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더 나아가 세계사의 맥락에서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평범하지만 때때로 간과하게 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일관되게 정직하다. ‘부끄럽다’고 생각한 부분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평양제2중학교(평2중) 시험에 응시했다 뜻밖에 낙방한 사실, 국민방위군 때 너무 배고파 당번이 돼 배급을 받아 올 때 밥통에서 밥을 몰래 꺼내 먹은 일,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가 죽을 뻔한 여러 위기를 넘긴 배경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기도가 있었다. 여러 대목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감사함을 표현한 부분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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