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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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지키면서 敵軍 최소화”

DJ정부 ‘최장수 장관’ 비결…김포 매립지 용도 변경 끝까지 불허

  • 입력2006-02-03 12: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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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칙 지키면서 敵軍 최소화”
    김대중정부 첫 내각은 1998년 3월3일 출범했다. 그날 신임 각료들은 김대통령과 함께 밝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로부터 만 2년이 지난 지금 이 얼굴 중 현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김대통령을 제외하면 김성훈 농림부장관(61) 한 사람뿐이다(진념씨는 처음 장관급인 기획예산위원장이었다가 중간에 기획예산처장관이 됐다).

    농림부는 52년 역사 속에서 50명의 장관이 취임했으니 단명 장관이 계속된 부서다. 김장관은 이러한 부서를 맡고도 현 정부의 최장수 장관이 되고 있으니 그 비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장관은 중앙대 교수와 경실련 지도위원을 지낸 재야쪽 사람이다. 야인일 때야 아무렇게나 외쳐도 책임을 묻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각료가 돼 야인 시절의 주장대로 개혁할라치면, “어디 당신은 얼마나 잘났는지 보자”며 뒷조사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교수 출신에 재야 성향의 장관은 대개 단명을 면치 못해 왔다. 그러나 김장관은 예외다. 왜 그럴까.

    지난 2년 사이 김장관도 산더미 같은 난관을 만났다. 하지만 원칙을 지키며 돌파해냈는데, 이것이 첫 번째 장수비결이다. 이러한 난관 중에서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동아건설의 ‘김포매립지 용도변경 요청’이었다. 동아건설은 91년초 농경지 조성을 목적으로 김포 앞바다에 400여만평의 매립지를 완성해 놓고 방치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94년부터는 농지가 아니라 위락단지로 만들겠다며 농림부에 용도 변경을 요청했으나, 농림부의 답변은 언제나 ‘불가’(不可)였다.

    IMF 한파가 혹독히 몰아치던 98년 동아건설은 자금부족으로 부도 위기에 몰렸다. 동아건설이 마지막으로 움켜쥔 ‘동아줄’은 외자를 유치해 김포매립지에 대단위 위락시설과 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동아건설은 언론에 “나라 경제가 다 망해 가는데, 대도시 근교에 있어 농사짓기도 어려운 땅의 용도를 왜 변경해주지 않는가”라는 읍소작전을 펼쳤다. 언론과 정치권, 그리고 인천시마저 동아건설 편으로 기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원석 동아건설회장이 사장단을 이끌고 김장관을 찾아왔다. 김장관도 차관 이하 국-과장을 배석한 채 맞았다. “용도를 바꿔주면 당장 40억달러를 유치해 동아건설도 살리고 외채 위기도 극복하는데 일조하겠습니다” “안됩니다. 애초 허가난 대로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싸움을 반복하다 최회장은 떠나갔다. 이때 김장관은 배석한 과장에게 대담을 기록해 놓게 했다.

    10여일 뒤 동아건설이 돌연 다국적 투자자문사인 ‘프라이스 워터스’로부터 40억달러를 유치해 김포매립지에 대규모 위락단지와 산업단지를 만드는 계약을 맺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김장관이 김포매립지의 용도 변경을 허가해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고도의 공작’일 수가 있었다. 40억달러를 유치한다는데 감히 누가 막아설 것인가. 그러나 김장관은 동아건설이 계약을 체결키로 한 날 최회장과의 회의록을 전격 공개하고 용도변경을 허가한 적이 없다고 반격했다.

    동아건설은 마지막 ‘희망’도 물거품이 되자 곧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부자는 망해도 3대를 간다’ 고 곧 반격이 들어왔다. 최회장의 친동생이 경영하는 한 언론사가 김장관 차남의 병역문제를 들고나온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김장관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84년 처가 뇌출혈로 사망해 하루아침에 홀아비가 됐다. 그때 내가 얼마나 불쌍해 보였는지 미국에 사는 여 고종사촌네가 둘째 놈을 데려다 키우겠다고 했다. 둘째는 미국유학 중에 낳았기 때문에 미국과 한국 이중 국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이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고 생각하고 보냈다.

    그 뒤 미국에서 자란 이 아이는 미국인이 되고자 했다. 미국인이 되려면 한국 국적을 버려야 하는데, 한국 국적 이탈은 만 30세가 넘어야 신청할 수가 있다. 이러는 사이 이 아이의 병역은 ‘징병검사 연기’ 로 기록됐는데, 언론은 바로 이 사실을 보도한 것이었다. 내가 버린 아이를 갖고 그런 보도가 나오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천형’(天刑)으로 생각하고 달게 받았다.”

    이 사건으로 김장관은 도덕성을 의심받게 되었다. 그러나 김장관은 당당했다. “그때 IMF라는 상황논리에 밀려 김포매립지의 용도를 변경해줬다고 치자. 그랬다면 총선 국면이 뜨겁게 달아오른 지금쯤, 야당은 틀림없이 김포매립지 용도변경은 ‘제2의 수서비리 사건’이라고 치고 나왔을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는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흔들렸을 것이다. 내가 재벌그룹을 망하게 했는지는 몰라도, 정권과 나라가 위기에 빠지는 것은 막아냈다.”

    국민은 농촌을 따뜻한 고향으로 여기지만, 농정(農政)은 ‘눈 먼 돈은 먼저 받아먹는 놈이 장땡’인 복마전이 돼 버린지 오래다. 우루과이라운드의 파고가 높았던 김영삼정부 시절, 정부는 무려 42조원을 쏟아 부었지만 농업이 비약적으로 개선됐다는 얘기는 없다. 오히려 이 돈은 회수하기 어려운 부실채권이 될 것이라는 지적만 늘고 있을 뿐이다. ‘돈 먹는 하마’가 돼 버린 농정. 하지만 ‘메스’를 들이대면 금방 “농업을 죽이려 한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온다. 언론과 정치권은 이러한 아우성에 동정적이었다. 이러니 한국 농업은 세계화라는 풍파를 이겨내는 꿋꿋한 거목이 아니라, 편식을 일삼는 온실 속의 콩나물이 돼 버렸다. 어떻게 체질을 개선할 것인가.

    농촌에 가면 저수지 물을 대주는 대가로 농민들로부터 ‘수세’(水稅)를 받는 농지개량조합이 있다. 저수지는 정부가 지어준 것이고 조합은 그저 관리만 하는 곳인데, 이 조합에 적을 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수세로는 직원 봉급 주기도 모자라 상당액을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조합이라면 일찌감치 파산됐어야 하는데, 농업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 때문에 어떤 정권도 이 조합을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김장관은 올해 1월 이 조합들을 ‘농촌기반공사’로 이름을 바꾼 농어촌진흥공사로 합병시켰다.

    이어 올 7월을 목표로 농협-축협-인삼협의 중앙회를 통합하는 ‘칼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저항이 여간 만만치 않았다. 중앙회 통합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로 한 날 신구범 축협중앙회회장은 국회에서 할복소동을 벌였다. 그런데도 법안이 통과하자 축협중앙회측은 ‘김장관이 축산을 하다 빚까지 진 윤모 할머니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는 광고를 하고 나왔다. 김장관이 윤할머니를 고소한 데는 이유가 있지만(지금은 취하), 이 광고는 김장관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았다.

    칼질은, 맞는 쪽도 ‘열’을 받지만, 휘두르는 쪽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김장관은 최근 스트레스로 흔들리던 앞니 5개를 뽑고 틀니를 해 넣었다. 그도 괴로운 것이다. 괴로우면 그도 감정적이 되기 쉬울텐데 그는 손을 ‘싹싹’ 비비며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다. “나는 하도 손바닥을 비벼대서 손금이 없어요. 비벼야지요. 싹싹 비벼야 적군(敵軍)이 최소화될 것 아닙니까.”

    YS시절만큼이나 많은 장관이 바뀌고 있는 김대중정부에서 김장관이 장수하는 이유는, 그래도 그는 원칙에 강했고, 해야 할 개혁은 밀고 나갔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을 낮춰 반격을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 같다.

    외부인을 맞는 김장관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YS정부 시절 최장수 장관은 오인환 공보처장관이었다. 그는 YS와 5년 임기를 같이했다. 김장관도 과연 김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할 수 있을까. 2년 전 요란했던 개혁이 곳곳에서 무너지는 징후를 보이는 지금, 국정을 책임진 사람들은 한 번쯤 김장관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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