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카다피 국가원수의 ‘오른팔’로 불리던 무사 쿠사 전 외무장관의 신병 처리 문제를 놓고 영국 정부가 속병을 앓고 있다. 3월 말 카다피 체제에 등을 돌리고 영국에 망명 신청을 한 쿠사 전 장관은 존재만으로도 대단한 선전 효과를 노릴 수 있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서방 진영으로선 카다피 체제의 붕괴를 앞당길 수도 있는 대형 호재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그의 과거 전력으로 보아 꺼림칙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먼저 그동안 영국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상 테러에 쿠사 전 장관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민간인 테러공격에 희생된 가족이나 친척 등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유럽과 리비아 무기 거래 깊숙이 개입
쿠사 전 장관 처리 문제에 대한 영국 정부의 처지를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배경과 이력을 가진 인물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말 미국 미시간대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유학생이었던 그는 카다피 정권에서 주영국대사라는 요직을 맡아 국제 외교 무대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그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영국 외교관 중에는 그를 외교적 화술에 능한 직업 외교관이라기보다 군사혁명에 성공한 카다피 세력이 파견 보낸 행동대원쯤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쿠사 전 장관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와 리비아의 무기 거래에도 깊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 아일랜드 내 종교분쟁을 주도한 테러세력이었던 아일랜드공화군(IRA)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혀 파문을 몰고 오기도 했다. 외교적 논란이 거듭되자 영국 정부는 그를 본국으로 추방했다. 따지고 보면 쿠사 전 장관의 영국 망명 역시 외교부의 임시 입국 허가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
쿠사 전 장관이 서방과의 외교 무대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 9·11테러 직후였다. 알 카에다의 배후를 캐려고 전방위적인 정보 사냥에 나선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그를 불러낸 것이다. 당시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암약하는 알 카에다 조직도가 담긴 파일을 들고 런던으로 날아와 CIA팀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미국이나 영국이 좋아할 만한 특급 정보 거래를 통해 서방의 목조르기를 피해나가는 카다피식 외교의 최일선에서 그가 맹활약했던 것이다.
최근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 국무부 자료에서 쿠사 전 장관을 ‘지적인 능력과 작전 수행능력, 그리고 정치적 비중까지 갖춘 몇 안 되는 리비아 관료’라고 묘사한 것도 그의 이런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유엔의 공습 결의 이후 카다피 체제 축출을 공언해온 영국 및 연합군 측으로선 이런 경력의 거물급 인사가 망명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만으로도 심리전과 정보전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의 화려한 정보기관 경력 때문이다. 일각에선 해외 공작 파트를 담당했던 쿠사 전 장관이 그동안 테러 의혹 사건의 배후라는 주장을 끊임없기 제기해 왔다. 그의 망명 후 다시 주목을 끄는 대표적 테러사건은 1988년 발생한 이른바 ‘로커비 민항기 폭파사건’이다. 스코틀랜드 남부 로커비 상공에서 미국 민간 항공기인 팬암(Pan Am) 103편이 공중 폭발해 270명의 민간인 승객과 승무원이 모두 숨졌다.
수 년간의 수사 끝에 스코틀랜드 검찰은 리비아 국적의 바셋 알리 알 메그라히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후 카다피 정권은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꾸준히 석방 교섭을 벌여왔다.
2009년 알 메그라히가 전립선암 말기로 3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의사 소견에 따라 스코틀랜드 정부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그를 석방했다. 석방된 알 메그라히는 리비아에서 열렬한 환영과 함께 영웅 대접을 받았다. 팬암기 폭파로 180명의 자국민이 희생된 미국 정부와 의회는 스코틀랜드 정부의 결정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문제는 ‘3개월 시한부’라던 알 메그라히가 지금까지도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국 석유회사인 BP가 리비아로부터 석유 개발권을 따내려고 알 메그라히를 석방시켰다는 ‘빅딜설’이 퍼졌고, 영국 정부는 곤경에 빠졌다. 미국과 영국 간에도 심각한 외교 갈등이 야기됐다.
바로 이 팬암기 폭파사건 당시 쿠사 전 장관은 리비아 정보기구의 고위직으로 근무했고 몇 년 뒤인 1994년 정보기구 수장에 올랐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알 메그라히를 석방하기 위한 스코틀랜드와 리비아 간 비밀 협상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팬암기 테러사건과 관련해 스코틀랜드 검찰은 일단 용의자가 확보된 이상 추가 수사에 나서겠다고 했다. 이미 영국 외교부를 통해 쿠사 전 장관을 1차 접견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쿠사 전 장관을 보호하는 영국 정보 당국은 그가 ‘자발적으로’ 수사 관계자들을 만났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밝히지 않고 있다.
정보기관 M16엔 ‘달콤한 유혹’
쿠사 전 장관이 테러 지원과 관련해 의혹을 사는 사건은 이것만이 아니다. 얼마 전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리비아 정권이 1990년대 민간인 대상 폭탄테러 사건을 일으켜온 IRA 측에 무기를 제공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국 의회는 물론 테러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척은 쿠사 전 장관의 영국 망명 소식이 알려진 직후부터 정부가 테러범에게 오히려 은신처를 제공한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일각에서는 쿠사 전 장관에게 망명 허가를 내줄 것이 아니라 체포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그러나 카다피 세력 제거를 통해서만 리비아 내전 사태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보는 영국 정부의 속내는 다르다. 사실상 영국 정보기관인 MI6의 물밑 작업으로 이뤄낸 쿠사 전 장관의 ‘거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제2, 제3의 고위 인사 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군사 공격을 통해 카다피를 리비아에서 몰아내는 것보다 정보 공작을 통해 내부 붕괴를 유도하는 편이 오히려 빠를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영국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데는 쿠사 전 장관이 오래전부터 영국 정보기관과 구축해온 내밀한 협력 관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대표적 사례가 영국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중재로 이뤄졌던 2003년 리비아의 핵 포기 선언이다. 쿠사 전 장관은 당시 MI6과 몇 달간 막후 협상을 벌여 핵무기 포기를 대가로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 해제라는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구실을 하기도 했다.
쿠사 전 장관이 갖는 이런 독특한 위치 때문에 영국 정부는 ‘테러범으로 처벌하라’는 국내 여론에도 그의 신병 문제를 쉽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외교부는 쿠사 전 장관의 망명을 허용하는 문제와 과거 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 문제는 별개라며 일단 선을 긋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쿠사 전 장관을 테러 관련 블랙리스트에서 삭제하고 금융자산에 대한 동결을 해제하는 등 사실상 사면 절차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도 쿠사 전 장관이 가진 정보와 경험은 영국 외교부와 MI6 처지에서는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설령 내전이 조만간 종식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향후 카다피 체제 의 약점을 잡아내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전보다 더 치열한 정보 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먼저 그동안 영국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상 테러에 쿠사 전 장관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민간인 테러공격에 희생된 가족이나 친척 등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유럽과 리비아 무기 거래 깊숙이 개입
쿠사 전 장관 처리 문제에 대한 영국 정부의 처지를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배경과 이력을 가진 인물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말 미국 미시간대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유학생이었던 그는 카다피 정권에서 주영국대사라는 요직을 맡아 국제 외교 무대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그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영국 외교관 중에는 그를 외교적 화술에 능한 직업 외교관이라기보다 군사혁명에 성공한 카다피 세력이 파견 보낸 행동대원쯤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쿠사 전 장관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와 리비아의 무기 거래에도 깊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또 아일랜드 내 종교분쟁을 주도한 테러세력이었던 아일랜드공화군(IRA)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혀 파문을 몰고 오기도 했다. 외교적 논란이 거듭되자 영국 정부는 그를 본국으로 추방했다. 따지고 보면 쿠사 전 장관의 영국 망명 역시 외교부의 임시 입국 허가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
쿠사 전 장관이 서방과의 외교 무대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 9·11테러 직후였다. 알 카에다의 배후를 캐려고 전방위적인 정보 사냥에 나선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그를 불러낸 것이다. 당시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암약하는 알 카에다 조직도가 담긴 파일을 들고 런던으로 날아와 CIA팀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미국이나 영국이 좋아할 만한 특급 정보 거래를 통해 서방의 목조르기를 피해나가는 카다피식 외교의 최일선에서 그가 맹활약했던 것이다.
최근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 국무부 자료에서 쿠사 전 장관을 ‘지적인 능력과 작전 수행능력, 그리고 정치적 비중까지 갖춘 몇 안 되는 리비아 관료’라고 묘사한 것도 그의 이런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유엔의 공습 결의 이후 카다피 체제 축출을 공언해온 영국 및 연합군 측으로선 이런 경력의 거물급 인사가 망명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만으로도 심리전과 정보전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의 화려한 정보기관 경력 때문이다. 일각에선 해외 공작 파트를 담당했던 쿠사 전 장관이 그동안 테러 의혹 사건의 배후라는 주장을 끊임없기 제기해 왔다. 그의 망명 후 다시 주목을 끄는 대표적 테러사건은 1988년 발생한 이른바 ‘로커비 민항기 폭파사건’이다. 스코틀랜드 남부 로커비 상공에서 미국 민간 항공기인 팬암(Pan Am) 103편이 공중 폭발해 270명의 민간인 승객과 승무원이 모두 숨졌다.
수 년간의 수사 끝에 스코틀랜드 검찰은 리비아 국적의 바셋 알리 알 메그라히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후 카다피 정권은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꾸준히 석방 교섭을 벌여왔다.
2009년 알 메그라히가 전립선암 말기로 3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의사 소견에 따라 스코틀랜드 정부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그를 석방했다. 석방된 알 메그라히는 리비아에서 열렬한 환영과 함께 영웅 대접을 받았다. 팬암기 폭파로 180명의 자국민이 희생된 미국 정부와 의회는 스코틀랜드 정부의 결정을 맹비난하고 나섰다.
문제는 ‘3개월 시한부’라던 알 메그라히가 지금까지도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영국 석유회사인 BP가 리비아로부터 석유 개발권을 따내려고 알 메그라히를 석방시켰다는 ‘빅딜설’이 퍼졌고, 영국 정부는 곤경에 빠졌다. 미국과 영국 간에도 심각한 외교 갈등이 야기됐다.
바로 이 팬암기 폭파사건 당시 쿠사 전 장관은 리비아 정보기구의 고위직으로 근무했고 몇 년 뒤인 1994년 정보기구 수장에 올랐다. 그뿐 아니라 그는 알 메그라히를 석방하기 위한 스코틀랜드와 리비아 간 비밀 협상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팬암기 테러사건과 관련해 스코틀랜드 검찰은 일단 용의자가 확보된 이상 추가 수사에 나서겠다고 했다. 이미 영국 외교부를 통해 쿠사 전 장관을 1차 접견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쿠사 전 장관을 보호하는 영국 정보 당국은 그가 ‘자발적으로’ 수사 관계자들을 만났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밝히지 않고 있다.
정보기관 M16엔 ‘달콤한 유혹’
쿠사 전 장관이 테러 지원과 관련해 의혹을 사는 사건은 이것만이 아니다. 얼마 전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리비아 정권이 1990년대 민간인 대상 폭탄테러 사건을 일으켜온 IRA 측에 무기를 제공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국 의회는 물론 테러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척은 쿠사 전 장관의 영국 망명 소식이 알려진 직후부터 정부가 테러범에게 오히려 은신처를 제공한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일각에서는 쿠사 전 장관에게 망명 허가를 내줄 것이 아니라 체포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그러나 카다피 세력 제거를 통해서만 리비아 내전 사태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보는 영국 정부의 속내는 다르다. 사실상 영국 정보기관인 MI6의 물밑 작업으로 이뤄낸 쿠사 전 장관의 ‘거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제2, 제3의 고위 인사 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군사 공격을 통해 카다피를 리비아에서 몰아내는 것보다 정보 공작을 통해 내부 붕괴를 유도하는 편이 오히려 빠를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영국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는 데는 쿠사 전 장관이 오래전부터 영국 정보기관과 구축해온 내밀한 협력 관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대표적 사례가 영국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중재로 이뤄졌던 2003년 리비아의 핵 포기 선언이다. 쿠사 전 장관은 당시 MI6과 몇 달간 막후 협상을 벌여 핵무기 포기를 대가로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 해제라는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구실을 하기도 했다.
쿠사 전 장관이 갖는 이런 독특한 위치 때문에 영국 정부는 ‘테러범으로 처벌하라’는 국내 여론에도 그의 신병 문제를 쉽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외교부는 쿠사 전 장관의 망명을 허용하는 문제와 과거 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 문제는 별개라며 일단 선을 긋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쿠사 전 장관을 테러 관련 블랙리스트에서 삭제하고 금융자산에 대한 동결을 해제하는 등 사실상 사면 절차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도 쿠사 전 장관이 가진 정보와 경험은 영국 외교부와 MI6 처지에서는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설령 내전이 조만간 종식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향후 카다피 체제 의 약점을 잡아내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전보다 더 치열한 정보 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