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 사고 후 3월 21일 첫 비가 내리자 외국인으로 붐벼야 하는 도쿄 긴자 거리에 행인이 거의 없다.
도쿄 신주쿠(新宿)에서 특급열차 ‘로망스 카’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가나카와(神奈川)현 하코네(箱根)온천. 일본인뿐 아나라 한국 관광객 등 외국인에게도 인기 있는 관광 명소다. 그러나 지진 발생 후 이곳 사람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코네관광협회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하코네유모토(箱根湯本) 역 입구에 영어, 한국어, 중국어로 응대할 수 있는 관광안내소를 두 곳 운영한다. 그러나 이곳 관광안내소장은 “지진 후엔 하루 몇 명밖에 오지 않는다. 한 명도 오지 않는 날도 있다”고 말했다.
도쿄디즈니랜드 간신히 영업 재개
하코네 명물인 ‘흑계란’(화산연기가 피어오르는 계곡에서 유황온천물에 삶은 달걀)을 파는 가게는 파리를 날린다. 지진 이전엔 외국인을 태운 대형 관광버스가 매일 100대 이상 대기하던 이곳 버스전용주차장도 텅텅 비었다. 3월의 외국인 이용자 수는 전년 같은 달보다 70%나 떨어진 446건에 불과하고, 외국인 숙박객의 예약 취소율도 90%에 달했다. 외국인뿐 아니라 일본인도 지진 발생 후 자숙 분위기에 따라 온천여행을 자제해 예년 같으면 상춘객으로 붐볐을 이 무렵, 하코네는 파리를 날리고 있다.
후지(富士) 산 주변의 후지큐랜드 같은 관광지도 마찬가지로, 외국인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번 대지진 때 침수 등의 피해를 입었던 치바(千葉) 현 도쿄디즈니랜드는 그동안 계속 휴업을 해오다 4월15일 영업을 재개했으나 영업시간을 오후 6시까지로 단축했다. 도쿄 도심도 다르지 않다. 긴자(銀座)의 고급백화점을 찾던 중국인 관광객도, 수산시장인 츠키지(築地)를 즐겨 찾던 서양인도 자취를 감췄다.
보통 때 같으면 중국이나 한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으로 붐빌 도쿄의 전자상가 아키하바라(秋葉原)에도 지진 후 외국인의 발길이 뚝 끊겼다. 외국인 대상 면세점을 경영하는 한 전자상품가게 주인은 “지진 영향으로 외국인 고객이 자취를 감춰 전체 매출이 3월엔 20% 정도 줄었고, 4월엔 훨씬 더 큰 폭으로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진이 일어난 동북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서일본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간사이(關西) 지역인 교토(京都)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 중 하나인 기요미즈사(淸水寺). 예년의 경우 벚꽃이 만개하는 4월 초 절의 정문인 인왕문(仁王門) 앞은 기념촬영을 하는 외국인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대지진 이후 외국인 발길이 끊겨 최근엔 어쩌다 배낭을 멘 서양청년이 한둘 보일 뿐이다. 이 절 사무장은 “중국, 한국에서 단체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앞이 보이질 않는다”고 우려했다. 절 인근의 기념품가게 주인은 “손님의 60% 이상이 외국인이었는데, 힘들다”고 토로했다.
오사카(大阪)에 있는 미국 영화 테마파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은 중국 등 아시아 관광객의 발길이 끊겼다. 이 회사의 미국인 사장 글렌 겐펠은 “각국 정부가 일본에 가는 것을 삼가도록 자국민에게 요청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현 사세보(佐世保)에 있는 대형 리조트시설 하우스텐보스에도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 사와다 히데오(澤田秀雄) 사장은 “언제까지 마이너스가 계속될지…. 경영에도 엄청난 타격”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규슈의 유명 온천지인 오이타(大分) 현의 벳푸(別府)에도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숙박 취소 사태가 줄을 잇는다. 관광협회 관계자는 “지진 후 취소된 것만 5000건 이상이다. 외국인의 발길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인기 명소인 하코네온천의 흑계란을 찾는 외국인도 크게 줄었다.
그러나 지진이 발생한 3월, 나리타(成田)공항과 간사이 공항으로 들어온 외국인 수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60% 이상 감소했다. 당장 미조하타 히로시(溝畑宏) 관광청장관은 “올해 목표인 1100만 명 유치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원전사고가 언제 수습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관광정책은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
‘관광입국’ 목표 달성 가물 가물
지진 발생 직후 도쿄에 있던 각국 대사관 중 독일, 크로아티아 등 32개국이 대사관 업무를 오사카로 이전하거나 폐쇄했고, 4월 5일 현재 독일 등 12개국은 여전히 도쿄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들 대사관은 “사태가 정상화되면 도쿄로 돌아간다”는 계획이지만 시기 등 구체적인 일정과 조건은 밝히지 않고 있다.
지진 발생 후 일본의 외식업체 등에서 일하던 1만 여 명이 훨씬 넘는 외국인 근로자가 귀국한 후 돌아오지 않아 관련 업계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일본 진출 외국기업 중에는 지진 발생 후 자국에서 파견한 사원을 귀국시키는가 하면 아예 홍콩 등지로 회사를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곳도 있다.
독일 폭스바겐의 일본법인 폭스바겐 그룹 재팬은 본사에서 온 직원 12명중 9명을 귀국시켰고, 정보기술 시스템 구축 전문회사인 타타 컨설팅 서비스 재팬은 인도인 직원 거의 대부분을 귀국시켰다. 이들이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지는 “원전사고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본사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본 매스컴들은 “일본에 진출해 있던 외국기업 중 상당수가 지진 발생 후 홍콩으로 이전하려고 사무실 등을 알아보고 있다”고 홍콩발 기사를 전한다.
외국인들이 지진 발생 후 일본 여행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삼가는 것은 각국 정부가 자국민의 일본 동북 지역 여행을 제한하거나 여타 일본 지역으로의 여행 유의를 권유하는 데다, 사람들이 매스컴을 통해 일본 원전사고를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측은 해외 매스컴이 “원전에서 흘러나온 방사능을 사실 이상으로 과장해 공포심을 부추기는 것도 한 원인”(요미우리신문, 4월 7일자)이라고 주장한다.
그동안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오던 ‘안전신화’의 명성은 이번 지진으로 크게 실추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지진 발생 후 뒤처리 등의 미숙으로 ‘천재(天災)’라기보다 ‘인재(人災)’라는 인식이 팽배해 일본의 안전신화는 큰 타격을 입었고, 외국인이 일본행을 기피하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