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공군 MiG-29 전투기. [뉴시스]
‘적당한’ 성능으로 설계된 MiG-29
Su-27은 낡았지만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기종이다. 옛 소련이 미국 F-14나 F-15 같은 고성능 제공전투기에 대응하고자 개발한 회심의 역작이다. 문제는 MiG-29다. 상세한 정보가 공개되기 전까지 MiG-29는 서방 측 모든 전투기를 압도하는 최강 전투기로 평가됐다. 특히 근접 공중전 능력은 당대 최강 근접전 파이터인 F-16을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부분 허상으로 드러났다. 애초에 MiG-29는 MiG-23 뒤를 잇는 ‘적당한’ 성능의 전선 요격기로 설계됐다. 그마저도 실제 성능은 소련 당국의 최초 요구보다 한참 떨어졌다. 소련 시절에도 MiG-29는 자국 군 당국의 외면을 받았고, 소련 붕괴 후 방위산업 수출 시장에선 Su-27에 완패했다.특히 우크라이나 공군이 보유한 초기형 MiG-29 성능은 여러모로 문제였다. 전투기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RD-33 엔진의 추력은 동급 전투기보다 우수한 편이었다. 문제는 추력 외 나머지 요소가 낙제점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문제가 400시간에 불과한 엔진 수명이다. 비슷한 시기 미국이 개발한 동급 전투기용 F404 엔진 수명 4000시간의 10분의 1에 불과한 수준. 보통 전투기 조종사의 기량을 유지하려면 연간 150~200시간 비행 훈련이 필요하다. MiG-29의 경우 통상적인 훈련만 해도 2~3년마다 엔진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 가난한 MiG-29 운용 국가들은 비행시간을 크게 줄이거나 엔진 수명을 넘기고도 전투기를 띄우는 실정이다.
미사일보다 짧은 레이더 사거리
MiG-29의 기체 형상도 문제로 꼽힌다. 독일 통일 직후 동독이 운용하던 MiG-29 몇 대가 미국으로 보내져 F-16C와 모의 공중전을 치렀다. MiG-29는 당시 최신 기종이던 F-16C 블록 50 기체를 근접전에서 모의 격추하는 등 공중 기동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모의 공중전 결과에는 한 가지 착시 효과가 있었다. MiG-29에만 있는 헬멧 장착 조준기(HMS)와 여기에 연동된 R-73 공대공미사일 성능이 변수로 작용한 것. 미국 측이 이 장치의 성능을 파악해 일선 전투기 성능을 개량한 이후 MiG-29는 실전에서 서방 전투기를 1대도 격추하지 못했다. MiG-29가 공중전에 취약한 이유는 잘못된 형상 설계로 파일럿의 시야가 제약받기 때문이다. 물방울 모양 캐노피를 채택한 서방 측 전투기와 달리 조종석 뒷부분이 중앙 동체로 가려진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조종사의 후방 시야가 대단히 제한돼 후방 또는 측후방에서 접근하는 적기를 볼 수 없는 것이다.전투기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더와 전자장비 성능도 취약하다. MiG-29에 탑재된 R-27 중거리공대공미사일의 사거리는 적외선 유도형인 R-27ET 버전이 약 30㎞, 레이더 유도형인 R-27R가 80㎞ 정도다. 그런데 MiG-29 초기형의 N019 레이더는 적 전투기를 마주한 상황에서 최대 70㎞, 적 전투기를 추격할 경우 최대 35㎞밖에 탐지하지 못한다. 아무리 긴 사거리의 미사일을 장착해도 레이더 성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MiG-29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서방 전투기들의 레이더는 4~8개 표적을 동시 추적해 2~6개에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진보했다. 반면 MiG-29는 최대 2개 표적을 추적해 그중 1개 표적만 공격할 수 있었다.
러시아 공군 Su-35 전투기. [뉴시스]
21세기 최초이자 사실상 유일한 에이스 파일럿에겐 ‘키이우의 유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키이우의 유령은 당초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떠돌던 ‘도시전설’ 취급을 받았으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 등은 “키이우의 유령은 실존하는 우크라이나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침공 직전 MiG-29 6대를 MiG-29MU1 버전으로 개량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14년 크림반도 사태 이후 러시아로부터 부품 수급이 불가능해진 MiG-29를 어떻게든 계속 유지하려는 자구책이었다. 기체 수명 연장을 위한 조치와 일부 전자장비 교체 위주의 사업으로, 비약적 성능 개량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구식 전투기로 어떻게 러시아 최신 전투기들을 상대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고성능 추력편향 레이더, 최신 공대공미사일로 중무장한 Su-35를 말이다.
나토의 실시간 정보 제공
키이우의 유령이 올렸다는 전과는 MiG-29 단독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보이지 않는 지원과 우크라이나군 방공 부대의 조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토는 개전 전부터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조기경보기를 띄우고 러시아 군용기의 움직임을 우크라이나 측에 실시간으로 알렸다. 그 덕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언제 어느 방향에서 어떤 전투기로 공격할지 사전에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우크라이나는 S-300, 부크(Buk) 지대공미사일 등 방공자산을 총동원해 다층 방공망을 구축했다. 우크라이나가 보유한 대공미사일체제도 노후했지만 뛰어난 전자전 능력을 갖추지 못한 러시아군 항공기에는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러시아 전투기들은 우크라이나 지상 레이더 탐지를 피하고자 저고도로 비행해야 했다.전투기 공중전에서 중요한 요소는 위치와 스피드다.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전투기를 띄워 고도와 속도에서 우위를 점한 우크라이나 MiG-29는 저공비행으로 적기를 비교적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MiG-29에 탑재된 헬멧 장착 조준기 역시 공중전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우크라이나는 ‘SURA-M’이라는 헬멧 장착 조준기를 생산해 러시아에 납품하고 자국 공군용 전투기에도 탑재했다. 이 장비는 조종사가 고개를 돌려 적기를 보면 자동으로 미사일 조준이 되는 장치다. 적기의 꼬리를 물기 위해 격렬한 공중 기동을 할 필요가 없어 근접 공중전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물론 러시아군 전투기에도 모두 달려 있는 장비이기에 우크라이나 MiG-29만의 절대적 강점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MiG-29가 러시아의 최신 수호이 전투기들에 결코 밀리지 않게 해주는 ‘비장의 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키이우의 유령은 정말 존재하는 파일럿일까. 또한 그가 세웠다는 전공은 사실일까. 나토와 지상 방공 부대의 지원, 헬멧 장착 조준기 같은 장비가 있다고 해도 우크라이나군 MiG-29 1대가 러시아군 전투기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21대 격추라는 기록을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 공군에는 파일럿을 충분히 훈련시킬 만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공군 전투조종사의 연평균 비행시간은 15~17시간으로 알려졌다. 북한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다. 얼마 전 전사한 우크라이나 공군의 전설적 베테랑 알렉산드르 옥산첸코 대령조차 지휘관 경력 없이 오로지 조종간만 잡았음에도 30년간 누적 비행시간이 2000시간 정도였다.
2월 27일 우크라이나 정부가 SNS에 올린 에이스 파일럿 ‘키이우의 유령’ 관련 홍보물. [우크라이나 정부 공식 트위터 캡처]
우크라이나 결집시킨 ‘희망’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정부는 적기 21대를 격추했다는 에이스 파일럿 키이우의 유령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군사 전문가들은 키이우의 유령이 파일럿 1명이 아닌 우크라이나 MiG-29 파일럿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젤렌스키 대통령은 나토에 우크라이나 전역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공군이 더는 러시아 공군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3월 4일 이후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 전투기 격추 기록은 모두 지대공미사일에 의한 것만 보고되고 있다.그럼에도 대통령까지 나서 키이우의 유령을 언급하는 이유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키이우의 유령은 개전 초 패배감에 사로잡힌 우크라이나군과 국민에게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우크라이나군과 국민은 무섭게 결집해 러시아군을 각지에서 격파하고 있다. 40년 전 나토가 MiG-29에 부여한 별명은 ‘펄크럼’(Fulcrum: 버팀목·지지대)이었다. 그 별명처럼 펄크럼을 탄 유령이 우크라이나인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