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를 앞두고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뉴시스, GettyImages]
머스크는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중국 지도부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5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국가주석의 최측근인 딩쉐샹 부총리를 비롯해 친강 당시 외교부장, 진좡롱 공업정보화부장, 왕원타오 상무부장 등 최고위급 인사와 줄줄이 회동했다. 올해 4월 베이징을 찾았을 때도 리창 총리가 국빈관에서 머스크를 맞이했다. 당시 리 총리는 “중국과 미국은 경제가 깊이 융합돼 있고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양국 모두 상대국의 발전으로부터 혜택을 얻고 있다”면서 “특히 중국에서 테슬라의 발전은 중·미 경제무역 협력의 성공 사례”라고 강조했다.
머스크 환대하는 중국 정부
일론 머스크가 지난해 11월 16일(현지 시간), 전날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악수한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며 “모두가 번영하길(May there be prosperity for all)”이라는 글을 남겼다. [일론 머스크 X(옛 트위터) 계정 캡처]
‘퍼스트 버디’(first buddy: 대통령의 단짝)라는 별명을 얻은 머스크는 트럼프 2기 백악관 참모와 장관 가운데 사실상 유일한 친중파로 꼽힌다. 머스크도 스스로를 친중 성향이라면서 중국의 인공지능(AI) 기술은 물론, 중국인의 역량이 뛰어나다고 칭송한 바 있다. 머스크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축하하기도 했고, 중국 영주권을 제안받은 적도 있다.
머스크는 팀 쿡 애플 CEO와 함께 중국에 가장 많이 투자한 미국 기업인이다. 테슬라는 연간 1만 개의 메가팩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는 신규 공장을 상하이에 건설 중이다. 또한 미국 네바다주에서 생산하는 전기차의 일부 모델에 필요한 배터리팩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테슬라는 그동안 중국 정부로부터 110억 위안(약 2조1700억 원) 상당의 저금리 대출과 보조금,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았다. 특히 머스크는 테슬라의 자율주행 지원 소프트웨어 FSD(Full Self-Driving)에 대한 중국 정부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머스크는 올해 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국산 전기차 관세를 100% 인상하자 미·중 갈등 심화를 우려하며 비판했다. 그는 유럽연합(EU)의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고율 관세 부과에도 반대 의견을 밝혀왔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는 11월 16일 3면에 테슬라의 중국 내 신에너지 자동차 사업에 관한 평론 기사를 게재하고 중국 전기차 산업에 대한 머스크의 공훈을 치켜세웠다. 런민일보가 주요 면에 외국 단일 기업을 비중 있게 소개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런민일보는 중국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매체다. 즉 중국 정부는 다가올 관세 전쟁에서 머스크가 미국과 중국의 가교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머스크 ‘제2의 헨리 키신저’ 되나
트럼프는 내년 1월 20일 취임하면 모든 중국산 제품에 60%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다. 국제사회는 미국과 중국의 관세 전쟁에서 머스크가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산 자동차에 200% 초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입장이다. 트럼프의 공약이 실제로 시행되면 중국산 자동차의 미국 수출은 사실상 차단된다. 이 경우 중국 정부는 보복 조치로 테슬라에 대한 제재에 나설 것이 분명하다. 중국과 사업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머스크로선 엄청난 손해를 볼 것이 확실한 만큼 미·중 갈등을 완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도 ‘라오펑유’(老朋友: 오랜 친구)로 불렸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처럼 머스크가 중재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1년 극비로 방중해 ‘죽(竹)의 장막’을 연 후 중국을 100차례 이상 방문한 끝에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첨예하게 대립하던 양국 관계를 개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키신저 전 장관은 역대 중국 지도부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다.
트럼프가 계획한 대중(對中) 관세에 머스크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미국 투자은행(IB) 제프리스의 필립 후쇼아 애널리스트는 “머스크가 중국과 트럼프 2기 정부 사이에서 ‘중요한 다리’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스콧 케네디 중국 비즈니스·경제 부문 수석은 “머스크가 워싱턴과 베이징의 교류를 중개하는 ‘제2의 키신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왕이웨이 중국 런민대 국제관계연구소장도 “머스크는 중국과 미국을 모두 이해하는 사업가”라면서 “트럼프가 예고한 관세 폭탄을 취소하거나 완화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국 경제매체 ‘이젠차이징’은 “머스크는 중국과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사업을 하는 동시에 양국 정부로부터 호감을 산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자국 시장에 진출한 외국 기업가가 중국 이익을 대변하도록 은밀하게 공작해왔다.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의 야쿠 왕 중국 연구 책임자는 “중국은 자국 시장 접근을 이용하는 등 외국 기업가를 조종해 자국 국익에 앞장서게 하는 데 매우 능숙하다”며 “머스크는 중국에 광범위한 사업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어 중국의 압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부가 머스크를 지렛대로 활용해 트럼프의 대중 압박이 완화되도록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머스크, 트럼프 2기 ‘와일드카드’
일론 머스크(왼쪽)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왼쪽에서 두 번째), 장남 트럼프 주니어(왼쪽에서 세 번째)와 함께 식사로 햄버거를 먹고 있다. [트럼프 주니어 X(옛 트위터) 계정 캡처]
하지만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내정자를 비롯해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피터 나바로 무역·제조업 선임 고문,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내정자 등 대중 강경파가 트럼프 주변에 포진해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왈츠 내정자는 중국을 “중국공산당”이라고 부르면서 미국과 중국이 ‘냉전’에 돌입했다고 지적했고, 루비오 내정자도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머스크의 친중 행보가 결국 트럼프와의 결별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머스크와 중국의 관계가 트럼프는 물론, 백악관 참모와 장관들의 관계에도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머스크가 사업이나 국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