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규모인 사우디아라비아 가와르 유전. [Ajel]
공급 부족에도 추가 증산 없다는 OPEC+
이처럼 어려움을 겪은 아람코의 앞날에 훈풍이 불고 있다. 올해 2분기부터 각국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늘고 경제 회복 조짐이 보이면서 석유 수요가 증가하고, 고유가 영향으로 순이익도 크게 늘어난 것이다. 아람코가 8월 발표한 실적 공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순이익은 472억 달러(약 56조2570억 원)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지난해 같은 기간 순이익 233억 달러(약 27조7710억 원)보다 103% 증가한 수치다. 특히 올해 2분기 순이익은 지난해보다 3배 가까이 증가한 255억 달러(약 30조3930억 원)에 달했다. 아민 알 나세르 아람코 최고경영자(CEO)는 “코로나19 델타 변이가 확산하는 등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각국의 경기회복 조짐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석유 등 에너지 수요가 강한 반등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아람코의 순이익 증가로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의 경제도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사우디의 지난해 재정적자는 794억 달러(약 94조6360억 원)로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12%에 달했다. 이 때문에 사우디는 올해 예산 지출을 2640억 달러(약 314조6610억 원)로 책정해 재정적자 규모를 GDP의 4.9% 정도로 낮추겠다는 목표까지 세운 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하면 사우디가 올해 재정적자를 기록하지 않으려면 유가는 67.5달러가 돼야 한다. 사우디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GDP 성장률이 -3.7%였으며 교역액 및 무역수지도 5년 내 최저치를 보이면서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사우디 정부는 재정의 87%를 아람코가 내는 배당금과 세금으로 충당해왔다. 하지만 2분기부터 국제유가가 오르면서 사우디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하고 있다. 실제로 국제유가가 최근 들어 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배럴당 80달러를 돌파했다. 올겨울 예년보다 심한 추위가 올 경우 배럴당 90달러를 넘어 100달러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국제유가가 대폭 오르는 이유는 무엇보다 수요는 급증하는데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9월 월간 보고서에서 “3분기 석유 수요가 회복세를 보이고, 내년 세계 석유 수요가 하루 1억80만 배럴로 2019년 세계 수요량(1억30만 배럴)을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OPEC은 당초 석유 수요가 내년 하반기에나 2019년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 시점을 상반기로 앞당겼다.
세계 최대 기업인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 본사. [Armco]
운송용 석유 수요도 상승 곡선
반면 석유 공급은 8월 허리케인 아이다가 미국 석유 생산시설이 밀집한 멕시코만을 강타하며 급감했다. 멕시코만에서 생산하는 원유는 미국 전체 생산량의 17%에 달한다. 또 OPEC과 비(非)OPEC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플러스(OPEC+)가 7월 매달 하루 40만 배럴씩 증산하기로 합의한 것도 공급 부족에 영향을 미친다. OPEC+는 10월 4일 화상으로 열린 장관회의에서 11월에도 같은 규모로 증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시 말해 하루 40만 배럴 이상씩은 추가 증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모하메드 바르킨도 OPEC 사무총장은 “OPEC+가 매달 하루 40만 배럴씩 증산하기로 한 결정은 공급 과잉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수요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OPEC+는 고유가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공급을 늘릴 경우 유가가 하락하고 이에 따라 석유 수출로 벌어들일 수 있는 오일 머니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유가가 폭락했을 때 입은 손해를 이참에 벌충하겠다는 속셈이라고 볼 수 있다. OPEC+는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가 될 때까지 추가 증산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그렇다면 국제유가는 과연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할 수 있을까. 미국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올겨울이 예년보다 추우면 석유 수요가 급증해 내년 초 국제유가가 10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BoA는 당초 내년 중반은 돼야 유가가 100달러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그 시기를 6개월 앞당겼다. 골드만삭스도 고객들에게 보낸 분석노트에서 세계 석유 수요가 델타 변이 충격을 딛고 예상보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반면, 석유 공급은 시장 예상치를 계속해서 밑돌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최대 석유거래기업 비톨의 러셀 하디 최고경영자(CEO)는 “유가 100달러는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밝혔다. 세계 최대 원자재 등 상품거래업체 트라피구라의 제러미 위어 회장도 “유가가 100달러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국제유가는 2014년 이후 배럴당 100달러를 넘긴 적이 없다. 미국 셰일혁명으로 공급이 과잉되면서 100달러 시대는 끝났다는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내년 초나 중반께 유가 100달러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면서 자동차와 항공기 등 운송용 석유 수요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플라스틱과 섬유 등에 쓰이는 각종 석유화학 제품 수요도 향후 10년간 높은 증가율을 보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석유 수요가 내년 말에는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적어도 2026년까지는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우디 정부는 저유가에 따른 재정적자로 대규모 투자를 하지 못했던 ‘비전 2030’ 계획을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비전 2030 계획은 사우디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가 추진해온 ‘포스트 오일 시대’에 대비한 경제개혁 정책으로,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 관광·금융·물류 등 비석유 부문을 개발해 재정 수입원을 다각화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우디 정부는 홍해 연안 아세르 지역을 2030년까지 관광객 1000만 명을 유치할 관광 중심지로 개발하기 위해 500억 리알(약 15조9015억 원)을 투자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2030년까지 관광산업을 GDP의 1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유가 10달러 오르면 미국 물가 2%p 올라
2019년 G20 정상회의에서 담소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SPA]
사우디도 마찬가지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최근 사우디를 방문한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에게 증산 여부와 관련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유가 급등으로 휘발유 가격이 크게 오르는 등 물가상승에 따른 미국의 경기회복 둔화를 우려하고 있다. 국제유가 10달러 상승은 미국, 영국, 유럽연합(EU) 물가를 연 2%p 끌어올리고, 특히 수입 원유 의존도가 높은 영국과 EU에 부정적인 영향을 더 크게 미칠 수밖에 없다. 국제유가는 앞으로 OPEC과 비OPEC의 대표국인 사우디와 러시아가 얼마나 증산하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 분명하다. 양국 모두 석유를 추가 생산할 여력이 충분하지만 유가가 상승하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기에 생산량을 크게 늘리지 않고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 석유 생산량 증·감축과 유가를 놓고 그동안 티격태격하던 양국이 이번에는 의기투합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