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느끼는 집 같은 포근함 호주 멜버른

[재이의 여행블루스]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 로스터리 카페, 재즈 선율이 어우러진 느긋함

  • 재이 여행작가

    입력2025-12-06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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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철도역인 플린더스 스트리트역. GETTYIMAGES

    오래된 철도역인 플린더스 스트리트역. GETTYIMAGES

    호주 남동부, 바닷바람이 머무는 포트 필립 베이 곁에 자리한 멜버른은 ‘살기 좋은 도시’라는 수식어보다 그 안에 스며 있는 일상의 결이 더 깊이 마음에 남는 곳이다. 도시를 향해 다가갈수록 고층빌딩 숲 너머로 빼곡히 얽힌 트램 선로가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흩어지면 골목 곳곳은 이미 하루의 리듬을 시작한 사람들로 분주히 움직인다. ‘퀸 빅토리아 마켓’에서는 빵 굽는 냄새와 신선한 과일이 아침 공기를 흔든다. 이른 시간 카페를 채우는 것은 커피 향만이 아니다. 벽에 붙은 예술 포스터, 갤러리에서 들려오는 현악기 소리, 신문을 펼친 노년의 손끝 등 도시 속 소소한 순간들이 여행자 감각을 일깨운다. 

    도시 역사 역시 흥미롭다. 19세기 골드러시(Gold Rush)로 급격히 성장한 도시답게 멜버른 곳곳에는 당시 흔적이 남아 있다. 웅장한 성당과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 오래된 철도역인 플린더스 스트리트역은 마치 시간을 품은 거대한 무대 같다. 하지만 이 도시가 현재에 머무는 방식은 과거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과 새것이 자연스럽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다. 

    도시 전체가 시간을 품은 무대

    멜버른 거리는 벽마다 그라피티가 가득한 대표 벽화 거리 호시어 레인(Hosier Lane)처럼 늘 색과 이야기를 품고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빈티지 상점과 독립서점, 로스터리 카페가 여행객을 맞는다. 언뜻 평범한 도시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거와 현재, 예술과 일상이 겹겹이 포개진 매혹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특히 플린더스 스트리트역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면 마치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무대가 된 듯하다. 트램이 천천히 선로를 지나가고, 예술가들은 거리 한구석에 앉아 기타를 연주한다. 도시가 내뿜는 속도는 빠르지만 눈앞에 펼쳐진 일상 풍경은 느리게만 흘러간다. 낯선 도시임에도 어쩐지 집 같은 포근함마저 느껴진다.  

    이 도시 중심에는 야라강이 흐른다. 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엔 상업과 예술의 구시가지, 남쪽엔 정원이 펼쳐진 주거지와 현대적 건물이 자리한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낮에는 강 위를 미끄러지는 카약과 조깅하는 사람들로 활기가 감돈다. 해가 기울면 강물에 비친 불빛들이 잔잔한 수면을 수놓는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사우스뱅크는 ‘멜버른 예술의 심장’으로 불린다. 예술을 사랑한다면 이 도시에서는 하루가 모자랄지도 모른다. 멜버른 아트센터와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이 자리한 이곳에서는 거의 매일 공연·전시가 이어지고, 거리에서는 재즈 선율이 흘러나온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도심 스카이라인은 낮의 청량함보다 어쩐지 따뜻한 빛을 품고 있다.

    멜버른의 시간은 자연 속에서도 숨 쉰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광활한 로열 보태닉 가든이 펼쳐진다. 햇살이 잔디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오후 도시 소음은 나무숲 너머로 아득해지고, 오리가 연못 위를 미끄러지듯 헤엄치며, 유칼립투스 향이 고요하게 주변을 채운다. 멜버른 사람들은 이 공원을 그저 산책하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돗자리를 편 채 소풍을 즐기고, 조용히 명상하는 모습에서 도시가 지닌 느긋함과 여유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근교로 발걸음을 옮기면 멜버른의 또 다른 얼굴이 펼쳐진다. 남쪽 해안에 자리한 세인트 킬다는 1912년 문을 연 루나파크 놀이공원과 해변이 공존하는 곳으로, 저녁이면 긴 부두 끝 펭귄들이 귀가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북동쪽 야라밸리에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여유로운 오후를 선물한다.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는 경험은 멜버른이 선사하는 가장 특별한 선물 가운데 하나다.

    멜버른을 대표하는 시장인 퀸 빅토리아 마켓. GETTYIMAGES

    멜버른을 대표하는 시장인 퀸 빅토리아 마켓. GETTYIMAGES

    국경을 넘나드는 멜버른 식탁

    멜버른은 음식 도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그리스, 베트남, 중국 등 다양한 이민자의 손끝에서 태어난 음식들이 멜버른 곳곳에 스며 있다. 퀸 빅토리아 마켓에서는 갓 구운 바게트와 치즈, 올리브, 향신료, 그리고 현지 농부가 직접 가져온 채소들이 활기차게 거래된다. 리틀 이탈리아 거리의 에스프레소 한 잔부터 차이나타운의 딤섬, 힙한 감성을 가진 피츠로이 거리의 비건 베이커리까지 멜버른 식탁은 국경을 넘나드는 문화의 기록이기도 하다. 

    멜버른은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대신 삶을 이루는 작은 순간이 모여 도시를 소개한다. 유럽풍 석조 건물과 근대 건축물 사이로 트램이 오가고, 골목에선 커피 내리는 향이 풍기며, 거칠지만 살아 있는 예술과 야라강 위로 스며드는 노을, 그리고 이주민 이야기가 담긴 음식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보폭으로 여행자의 하루를 부드럽게 감싸면서 알 수 없는 따뜻함으로 마음 한편을 채운다. 이 때문일까. 떠나온 삶의 자리도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그 온기가 바로 멜버른이 남기는 여운이다. 

    재이 여행작가는… 세계 100여 개국을 여행하며 세상을 향한 시선을 넓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삶의 대부분을 보낸 도시 생활을 마감하고 제주로 이주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노마드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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