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니워커 블루라벨. 디아지오 제공
그런데 이 철칙을 비웃기라도 하듯, 숫자 하나 없이 위스키계 지존(至尊)으로 군림하는 술이 있다. 전 세계 스카치위스키 판매 1위 브랜드 조니워커의 최상위 라인업인 ‘조니워커 블루라벨’이다.
세계 스카치위스키 판매 1위
도대체 왜 조니워커는 자신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최고급 위스키에 숙성 연도를 적지 않았을까. 그 배경에는 단순 숫자 표기로는 담아낼 수 없는, 제도 너머의 가치를 향한 집착이 숨어 있다.조니워커 역사는 19세기 스코틀랜드 킬마녹의 작은 식료품점에서 시작됐다. 당시 위스키는 단일 증류소에서 나온 싱글몰트 위주였는데, 품질 관리가 되지 않아 맛이 조악하고 들쭉날쭉하기 일쑤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니워커 창업자 존 워커는 식료품점에서 차를 블렌딩하는 기술을 위스키에 접목했다. 여러 원액을 섞어 언제 마셔도 균일하고 훌륭한 맛을 내는 블렌디드 위스키를 탄생시킨 것이다.
존 워커가 1867년 출시한 ‘올드 하일랜드 위스키’는 현대 조니워커의 모태로, 상업용 위스키의 표준을 정립했다. 이후 1857년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 알렉산더 워커는 산업혁명의 파도를 읽은, 천재적 전략을 세웠다. 증기선 발달로 대륙 간 이동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자 전 세계 항구를 누비는 선박 선장들을 브랜드 앰버서더(ambassador)로 활용한 것이다. 그들이 타국에 가 홍보를 담당하면서 조니워커가 스코틀랜드를 넘어 전 세계 술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상위 제품 이름이 왜 ‘블루라벨’일까. 여기에도 해상무역 역사와 맞닿은 흥미로운 연결성이 있다. 19~20세기 초 대서양을 가장 빠르게 횡단한 여객선에 수여되던 영예의 타이틀이 ‘블루리본(Blue Riband)’이다. 당시 영국 큐나드 라인, 독일 북독일 로이드 등은 자사 엔지니어링 기술이 세계 최고임을 증명하고자 천문학적 투자금을 쏟아부었고, 이들의 대서양 횡단 기록은 곧 국가 자존심을 건 대리전 양상을 띠었다. 기록을 경신한 배는 마스트에 파란 깃발을 휘날리며 항구로 들어왔는데, 조니워커는 이 타이틀에 영감을 받아 자신들의 걸작에 블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즉 블루라벨은 타협하지 않는 최고 퀄리티를 뜻하는 자신감의 표현인 셈이다.
조니워커 블루라벨 맛은 브랜드의 허리이자 대중적 제품인 ‘조니워커 블랙라벨’(12년)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확하다. 조니워커 라인업에서 두 제품은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블랙이 스코틀랜드 전역의 원액을 블렌딩해 균일한 맛을 내는 표준이라면, 블루는 이제는 운영되지 않는 ‘유령 증류소’의 희귀 원액을 블렌딩해 브랜드의 럭셔리 이미지를 견인하는 얼굴이다. 그래서 맛의 지향점도 다르다. 블랙은 피트(peat)향과 스모키함을 강조해 대중에게 강렬하고 남성적인 타격감을 주는 데 집중하는 반면, 블루는 희소 원액으로 복합적 풍미와 부드러운 목 넘김을 구현하는 데 주력한다. 하이볼이나 온더록스로 즐길 때 빛을 발하는 블랙과 달리, 블루는 니트(neat: 원액 그대로)로 마실 때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다층적 향과 긴 여운(finish)을 음미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싱글몰트 열풍 극복은 과제
조니워커 블루라벨이 숙성 연도 표기를 과감히 포기한 이유는 블렌디드 위스키라는 태생적 조건 때문이다. 법적으로 숙성 연도는 사용된 가장 어린 원액을 기준으로 표기해야 한다. 마스터 블렌더가 최상의 풍미를 위해 60년 묵은 고숙성 원액에 활력을 더할 8년 숙성 원액을 아주 조금이라도 섞는 순간, 그 위스키는 법적으로 ‘8년 숙성’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면 소비자는 8년이라는 숫자만 보고 술을 저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조니워커는 이 숫자의 딜레마를 거부했다. 표기법과 소비자 인식에 맞추기 위해 맛을 타협하는 대신, 숫자를 지우고 19세기 위스키 특유의 풍미를 온전히 재현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조니워커 모회사 디아지오가 보유한 1000만 개 넘는 오크통 가운데 선별한 희귀 원액, 그리고 포트 엘런(Port Ellen)이나 브로라(Brora)처럼 지금은 사라진 전설적인 증류소 원액까지 블렌딩해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 깊이를 만들어냈다.그런데 최근 10년 사이 위스키 시장 판도가 급격히 변했다. 바야흐로 취향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개성과 희소성, 수제(craft)의 가치를 내세운 싱글몰트 위스키가 폭발적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맥캘란, 발베니, 글렌피딕 등 싱글몰트 강자들은 ‘섞지 않은(single) 순수함’과 ‘오랜 시간(age)’을 무기로 소비자를 유혹한다. 반면 조니워커는 태생적으로 블렌디드 위스키다. 여러 증류소의 원액을 섞어 대량생산한다는 인식, 즉 공산품에 가깝다는 편견은 조니워커가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수많은 싱글몰트 애호가가 “진정한 위스키는 싱글몰트”라며 블렌디드 위스키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지금부터가 진짜 관전 포인트다. 싱글몰트가 개성을 추구하는 독주자(soloist)라면, 조니워커 블루라벨은 조화와 궁극의 밸런스를 찾는 지휘자(conductor)다. 싱글몰트가 특정 증류소의 날 선 캐릭터를 보여준다면, 조니워커 블루라벨은 수십 개 캐릭터를 지휘하는 웅장한 오케스트라 같은 풍성함을 선사한다. 과연 조니워커는 거센 싱글몰트 열풍 속에서 자신들이 지켜온 블렌딩 미학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것을 지켜보는 게 거대한 ‘위스키 전쟁’을 즐기는 가장 흥미로운 방법이 될 것이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