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1 안견의 ‘몽도원도’. 그림2 소릉에 쓴 작자 미상의 ‘몽유도원도’.
1447년 음력 4월 20일 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은 도원(桃源) 꿈을 꿨다. 꿈에서 깬 후 그는 안견(?∼?)에게 명해 꿈에서 본 도원을 사흘 만에 그리게 했다. 우리는 이 그림을 ‘몽유도원도’(그림1)라 부른다. 그 이유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글씨(그림2)가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 글씨가 안평대군 글씨로 학계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29년 일본 나이토 고난 박사가 발표한 논문(‘朝鮮 安堅の夢遊桃源圖’)에서다. 미술사가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책 ‘안견과 몽유도원도’(2009)에서 나이토 고난의 주장대로 이 글씨는 안평대군이 쓴 것이라고 했다.
비단 ‘소릉’에 쓴 안평대군 글씨 의심
안 교수는 스즈키 오사무가 1977년 발표한 논문을 근거로 ‘그림2’ 바탕이 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본 결과 ‘그림2’는 종이가 아니라 중국산 서화 창작용 비단인 ‘소릉(素綾)’이었다. ‘주간동아’ 873호에서 필자가 밝혔던 것처럼 소릉은 본래 명나라 성화(1465∼1487)와 홍치(1488∼1505) 연간부터 서화작품 창작에 사용됐다. 안평대군이 죽임을 당한 이후다. 나아가 ‘그림2’에 사용된 소릉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당연히 안평대군이 살아생전 썼을 리 없다. 결과적으로 안 교수가 인용한 나이토 고난과 스즈키 오사무 등 일본 학자 주장은 틀렸다.
소릉은 우리나라에서 1880년대부터 사용됐다. ‘그림2’는 나이토 고난이 논문을 발표한 1929년 이전에 쓰였다. 따라서 1880년부터 1929년 사이 우리나라 사람이 ‘그림2’를 썼다면 글씨 옆에 ‘아무개가 삼가 쓰다’ 등 윗세대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을 것이다. 이런 형식적인 부분이 없는 것을 보면 ‘그림2’는 일본인이 썼을 개연성이 높다.
안 교수는 ‘그림2’가 왕희지(307∼365) 행서를 연상시키고 안평대군이 쓴 ‘자작시’(그림3)와도 일치해 “안평대군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안평대군 글씨는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 황제와 외국 사신들로부터 조맹부(1254∼1322)에 버금가는 명필이란 평을 들었다. 그러나 ‘그림2’는 왕희지, 조맹부, 안평대군, 신숙주(1417∼1475), 박팽년(1417∼1456) 글씨와도 다르고, 조맹부 글씨가 유행했던 당시 글씨와도 같지 않다(그림4).
‘그림2’가 안평대군 글씨가 아니더라도 그림 제목은 ‘몽유도원도’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안평대군에게 명받아 신하들이 쓴 글을 보면, 그가 안견에게 그리게 한 것은 ‘몽유도원도’가 아니라 ‘몽도원도(夢桃源圖)’다. 현전하는 신하 21명의 글에서 제목이 붙은 것은 박팽년과 이현로(?∼1453) 글뿐이다. 박팽년은 ‘몽도원서(夢桃源序)’(그림5), 이현로는 ‘몽도원도부(夢桃源圖賦)’(그림6)라고 했다. 즉 ‘몽도원도’에 글을 썼다는 뜻이다. 신하인 그들이 안평대군 뜻과 다르게 임의로 제목을 정했을 리 없다.
글을 쓴 신하 21명 가운데 현재 문집이 전하는 이는 총 7명이다. 그중 이 그림을 ‘몽도원도’라고 한 이는 4명이다. 박팽년은 ‘박선생유고’에서 ‘몽도원도서(夢桃源圖序)’, 강석덕(1395∼1459)은 ‘진산세고’에서 ‘제몽도원도시권(題夢桃源圖詩卷)’, 신숙주는 ‘보한재집’에서 ‘제비해당몽도원도시축(題匪懈堂夢桃源圖詩軸)’, 서거정(1420∼1488)은 ‘사가시집’에서 ‘몽도원도’라고 했다.
그림3 안평대군이 쓴 ‘자작시’. 그림4 ‘몽유도원도’와 왕희지, 조맹부, 안평대군, 신숙주, 박팽년 글씨 비교. 그림5 박팽년의 ‘몽도원서’. 그림6 이현로의 ‘몽도원도부’.
나머지 3명 중 2명은 글 제목에서, 1명은 문장에서 이 그림을 ‘도원도(桃源圖)’라고 했다. 김담(1416∼1464)은 ‘무송헌선생문집’에서 ‘제도원도(題桃源圖)’, 최항(1409∼1474)은 ‘태허정시집’에서 ‘도원도삼십운(桃源圖三十韻)’이라고 했다. 사육신의 시문을 한 책으로 모은 ‘육선생유고’ 중 ‘성선생유고’를 보면 ‘도원도기(桃源圖記)’에서 이 글을 인용하고 제목을 ‘제비해당몽유도원도기후(題匪懈堂夢遊桃源圖記後)’라고 했다. 이는 ‘제비해당몽유도원기후(題匪懈堂夢遊桃源記後)’를 틀리게 쓴 것이다.
‘성선생유고’는 1570년경 윤유후(1541∼1606)가 성삼문(1418~1456) 글을 편집한 책이다. 여기에서 성삼문이 쓴 원문과 비교하면 빠진 글자가 2자이고 다르게 기록한 글자도 10자나 된다. 성삼문이 쓴 원문 첫 구절은 “아침에 도원도를 보고 저물녘에 도원기를 읽네(朝見桃源圖, 暮讀桃源記)”이다. 이렇듯 당시 신하들은 ‘그림1’을 ‘몽도원도’ 또는 ‘도원도’라고 했다.
‘그림1’ 제목을 ‘몽도원도’라 정하고, 1450년 안평대군이 쓴 자작시 ‘그림3’을 읽으면 다음과 같다. “세상 어디에 ‘몽도원’ 같은 곳이 있나/ 야복산관을 한 그 사람 아직도 눈에 선하네/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아/ 이대로 여러 천년 전할 만하네(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着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안평대군이 첫 구절에서 말한 ‘몽도원’은 바로 ‘그림1’을 지칭한다.
이 밖에 안 교수는 “그림 우측 가장자리에 ‘지곡(池谷) 가도작(可度作)’이라고 단정하게 쓰인 관서(款署)와 그 밑에 찍힌 ‘가도(可度)’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있어 안견의 작품임을 분명히 해준다. 이것들은 물론 제작 당시에 된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 왕에게 바치는 그림에는 화사(畵師)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주장이다. 그림은 안견이 그렸지만, 그림 위 글씨와 도장은 ‘그림2’처럼 후대 사람이 첨가한 것이다.
예부터 선비들은 “조금 의심하면 조금 진보하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진보한다”고 했다. 마음속 의문이 사라지도록 하는 게 공부라는 얘기다. 오랫동안 철석같이 믿었던 것에서 틀린 것을 찾고 올바르게 고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은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