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본 지가 너무나 까마득한 것 같군요. 그리워요…. 백만 번의 키스.”
얼마 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구설에 올랐다.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을 통해 사르코지가 각료회의장으로 향할 때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가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외신들은 일제히 프랑스 대통령의 ‘핑크빛 러브레터’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사르코지 측은 이 편지가 사르코지의 부인 세실리아의 오랜 친구인 이사벨 발카니가 세실리아에게 보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편지글 동사의 어미가 여성형이고 사르코지가 왜 아내의 편지를 가지고 다니냐는 반박이 나와 세인들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을 뿐이다.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국내에서도 신정아 씨가 변양균 전 대통령 정책실장에게 보냈다는 ‘가짜’ 연애편지가 인터넷상에 떠돌며 관심을 모았다. “전화하고 싶었어요. 낮부터요”로 시작해 “have (a) nice day. 당신의 신다르크로부터(저를 신데렐라라고 부르지 마세요. 꼭요)”라고 끝맺는 이 편지는 화가 클림트의 대표적인 작품인 ‘키스’와 ‘유디트1’이 언급되는 등 화려한 인용과 자극적인 멘트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비하면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이 로비스트 린다 김에게 보낸 “사랑하는 린다에게”로 시작하는 연서는 촌스럽고 순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눈에 봐도 그건 연애편지가 아니에요.”
소설가 서영은 씨는 연애편지를 결코 ‘세련될 수 없는’ 글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세간에 떠도는 신씨의 가짜 연애편지에 대해 “유혹을 의도했거나 조작한 티가 난다”며 연애감정을 가진 사람이 결코 쓸 수 없는 글이라고 평했다. 고(故) 김동리 선생의 아내이기도 한 서씨는 “작가들조차 격정에 휩싸여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탓에 쓰기가 꺼려지는 게 연애편지”라고 설명하면서, 김동리 선생이 ‘애인의 바람기에 대해 경고하고’자 쓴 소설 형식의 연애편지의 경우 “당시 너무 격정적으로 써서 몇 장 안 되는데도 각기 다른 종이에 적혀 있을 정도였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지나치게 염려하셨어요. 선생님(김동리)이 저를 좋아하시니까, 남들도 다 그런다고 생각하셨나봐요.(웃음)”
작가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확실히 연애편지에는 절절함과 격정이 담겨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밤늦게 쓴 연애편지를 다음 날 아침에 읽고 그 유치함에 당황한 적이 있었을 터. 연애편지 속 감정과잉은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이 훔쳐 읽으며 재현했던 남의 편지 내용(“정 말씀이야요?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당신의 목숨같이 나를 사랑하셔요? 나를, 이 나를”)과 다를 바 없이, 시대를 초월해 유치하고 빤한 면이 있다.
그놈의 유치한 글쓰기 부담…대필사이트 성업 중
그럼에도 사적인 편지만이 지닌 ‘친밀성’은 기술문명이 발달하고 속도가 중시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위력을 가진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사인 교수(동덕여대 문예창작과)는 “생각과 감정을 한 차례 걸러내 명확히 정리하는 게 글쓰기를 통한 소통의 장점이며, 편지는 그중 가장 쉽고 부담 없는 형태의 글쓰기”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한때 자신이 가르쳤던 대학 1학년생들에게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읽고 주인공이나 아사코의 처지에서 연애편지를 써보라는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고.
“편지를 쓰다 보면 상대를 향한 내 감정도 더 분명해지고, 진척되죠. 결국 연애편지를 씀으로써 상대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한편 연애편지는 연애를 위한 수단을 넘어 문학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 괴테의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원작인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는 연애편지 형식을 빌린 대표적인 고전소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연애편지 형식을 포함해 서간체 소설 자체가 드문 편이다.
“문학적 특성을 보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신은 신라시대 최치원의 ‘답절서주사공서(答浙西周司空書)’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0년 신문학에서는 이광수가 ‘어린 벗에게’로 서간체 단편을, 최남선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서간체 시를 처음 시도했고요. 한국에서 서간체 문학은 신경숙의 단편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 등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입니다.”
2006년 국내 최초로 연애편지 형식의 서간체 장편소설 ‘이상한 연애편지’를 발간한 김다은 교수(추계예대 문예창작과)는 ‘비밀스러움’을 한국식 편지의 특징으로 꼽는다. 그는 한국에서는 편지가 “발신자와 수신자만이 공유하는 내밀함을 넘어 타자의 눈이 닿지 않게 꽁꽁 숨겨놔야 하는 은밀함을 담고 있다”며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보정치 등을 거치면서 편지라는 개인기록이 사상 검증의 수단으로 쓰인 탓에 (편지가) ‘숨은 글쓰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사적 편지를 문학 텍스트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오랫동안 아쉬워했던 김 교수는 이를 깨보고자 지난해 김동리 김훈 마광수 이문재 하성란 등 한국의 대표적 문인 27명의 연애편지를 모아 ‘작가들의 연애편지’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때 모인 작가들은 ‘편지쓰는 작가들의 모임(http://cafe.naver.com/1004letterlove)’을 만들어 “우리 사회에 편지 쓰는 정서를 되 찾아주기 위해” 온오프라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자의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작가들도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자신의 연애 감정이 비록 짝사랑이라도 숭고하고 귀한 것임을 느끼게 하고, 연애편지를 쓰는 행위가 더는 유치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거죠.”
상대에게 망신당할 각오해야 상대가 감동
그렇다면 일반인이 연애편지를 쓰기 전 염두에 둬야 할 점은 뭘까. 김 교수는 “상대방에게 망신당할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편지를 귀하게 여기는 상대도 있겠지만, 귀찮아하거나 자칫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공개해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연애편지는 “생애 가장 황홀하고도 저항할 수 없는 순간의 기록”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런 말을 쓰면 수치를 당하지 않을까, 망신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서는 좋은 연애편지를 쓸 수 없어요. 온몸으로 써야죠. 비록 부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연애편지 한 통 써보는 것은 어떨는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한 사람들을 위해 20여 년 전 소설가 조정래 씨가 시인 아내 김초혜 씨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9월 서울 영인문학관에서 열린 ‘문인 편지전’에 공개돼 화제가 된 이 연서는 남편 조씨가 ‘태백산맥’ 집필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살던 당시, 흰머리가 났다는 아내 김씨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보낸 것이라고 한다. 지난 40여 년을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살아왔으며, 이제는 한 몸이 된 느낌”이라는 이 부부에게, 그동안 틈틈이 주고받은 연애편지는 변치 않는 40여 년 사랑의 증거로 남아 있다.
사랑하는 여보, 초혜!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소. 당신이 떠난 순간부터 가을은 문득 깊어져 내 시간을 쓸쓸한 적막으로 채우고 있소. 당신과의 23년 세월, 세월이 쌓일수록 당신을 아내로 얻었음을 하늘에 감사하게 되오. 당신도 나를 남편으로 얻었음이 나와 같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을까봐 두렵소. 오늘 아침나절에 놀라움이 깃든 음성으로 머리칼을 헤쳐 보였을 때 나는 우리의 삶 23년을 순간적으로 떠올렸고, 부끄러운 듯 숨어 있는 흰 머리카락들마저 대견하고 사랑스러웠소. 그래서 물을 들이지 말라고 했던 것인데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우리는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에 이르러 있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거요. 하늘은 언제나 우리를 축복하고 보살필 것이오. 혼자 자는 잠자리가 춥겠소.
1985. 9. 22. 밤,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할 당신의 남편 정래.
얼마 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구설에 올랐다.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을 통해 사르코지가 각료회의장으로 향할 때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가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편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외신들은 일제히 프랑스 대통령의 ‘핑크빛 러브레터’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사르코지 측은 이 편지가 사르코지의 부인 세실리아의 오랜 친구인 이사벨 발카니가 세실리아에게 보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편지글 동사의 어미가 여성형이고 사르코지가 왜 아내의 편지를 가지고 다니냐는 반박이 나와 세인들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을 뿐이다.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국내에서도 신정아 씨가 변양균 전 대통령 정책실장에게 보냈다는 ‘가짜’ 연애편지가 인터넷상에 떠돌며 관심을 모았다. “전화하고 싶었어요. 낮부터요”로 시작해 “have (a) nice day. 당신의 신다르크로부터(저를 신데렐라라고 부르지 마세요. 꼭요)”라고 끝맺는 이 편지는 화가 클림트의 대표적인 작품인 ‘키스’와 ‘유디트1’이 언급되는 등 화려한 인용과 자극적인 멘트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비하면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이 로비스트 린다 김에게 보낸 “사랑하는 린다에게”로 시작하는 연서는 촌스럽고 순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한눈에 봐도 그건 연애편지가 아니에요.”
소설가 서영은 씨는 연애편지를 결코 ‘세련될 수 없는’ 글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세간에 떠도는 신씨의 가짜 연애편지에 대해 “유혹을 의도했거나 조작한 티가 난다”며 연애감정을 가진 사람이 결코 쓸 수 없는 글이라고 평했다. 고(故) 김동리 선생의 아내이기도 한 서씨는 “작가들조차 격정에 휩싸여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야 하는 탓에 쓰기가 꺼려지는 게 연애편지”라고 설명하면서, 김동리 선생이 ‘애인의 바람기에 대해 경고하고’자 쓴 소설 형식의 연애편지의 경우 “당시 너무 격정적으로 써서 몇 장 안 되는데도 각기 다른 종이에 적혀 있을 정도였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지나치게 염려하셨어요. 선생님(김동리)이 저를 좋아하시니까, 남들도 다 그런다고 생각하셨나봐요.(웃음)”
작가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확실히 연애편지에는 절절함과 격정이 담겨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밤늦게 쓴 연애편지를 다음 날 아침에 읽고 그 유치함에 당황한 적이 있었을 터. 연애편지 속 감정과잉은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이 훔쳐 읽으며 재현했던 남의 편지 내용(“정 말씀이야요?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당신의 목숨같이 나를 사랑하셔요? 나를, 이 나를”)과 다를 바 없이, 시대를 초월해 유치하고 빤한 면이 있다.
그놈의 유치한 글쓰기 부담…대필사이트 성업 중
그럼에도 사적인 편지만이 지닌 ‘친밀성’은 기술문명이 발달하고 속도가 중시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위력을 가진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사인 교수(동덕여대 문예창작과)는 “생각과 감정을 한 차례 걸러내 명확히 정리하는 게 글쓰기를 통한 소통의 장점이며, 편지는 그중 가장 쉽고 부담 없는 형태의 글쓰기”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김 교수는 한때 자신이 가르쳤던 대학 1학년생들에게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읽고 주인공이나 아사코의 처지에서 연애편지를 써보라는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고.
“편지를 쓰다 보면 상대를 향한 내 감정도 더 분명해지고, 진척되죠. 결국 연애편지를 씀으로써 상대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소설가 조정래 씨가 20여 년 전 아내 김초혜 시인에게 <br>보낸 편지 일부.
“문학적 특성을 보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신은 신라시대 최치원의 ‘답절서주사공서(答浙西周司空書)’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0년 신문학에서는 이광수가 ‘어린 벗에게’로 서간체 단편을, 최남선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서간체 시를 처음 시도했고요. 한국에서 서간체 문학은 신경숙의 단편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 등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입니다.”
2006년 국내 최초로 연애편지 형식의 서간체 장편소설 ‘이상한 연애편지’를 발간한 김다은 교수(추계예대 문예창작과)는 ‘비밀스러움’을 한국식 편지의 특징으로 꼽는다. 그는 한국에서는 편지가 “발신자와 수신자만이 공유하는 내밀함을 넘어 타자의 눈이 닿지 않게 꽁꽁 숨겨놔야 하는 은밀함을 담고 있다”며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보정치 등을 거치면서 편지라는 개인기록이 사상 검증의 수단으로 쓰인 탓에 (편지가) ‘숨은 글쓰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사적 편지를 문학 텍스트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오랫동안 아쉬워했던 김 교수는 이를 깨보고자 지난해 김동리 김훈 마광수 이문재 하성란 등 한국의 대표적 문인 27명의 연애편지를 모아 ‘작가들의 연애편지’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때 모인 작가들은 ‘편지쓰는 작가들의 모임(http://cafe.naver.com/1004letterlove)’을 만들어 “우리 사회에 편지 쓰는 정서를 되 찾아주기 위해” 온오프라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자의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작가들도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자신의 연애 감정이 비록 짝사랑이라도 숭고하고 귀한 것임을 느끼게 하고, 연애편지를 쓰는 행위가 더는 유치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거죠.”
상대에게 망신당할 각오해야 상대가 감동
그렇다면 일반인이 연애편지를 쓰기 전 염두에 둬야 할 점은 뭘까. 김 교수는 “상대방에게 망신당할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편지를 귀하게 여기는 상대도 있겠지만, 귀찮아하거나 자칫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공개해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연애편지는 “생애 가장 황홀하고도 저항할 수 없는 순간의 기록”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런 말을 쓰면 수치를 당하지 않을까, 망신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서는 좋은 연애편지를 쓸 수 없어요. 온몸으로 써야죠. 비록 부치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연애편지 한 통 써보는 것은 어떨는지.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한 사람들을 위해 20여 년 전 소설가 조정래 씨가 시인 아내 김초혜 씨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9월 서울 영인문학관에서 열린 ‘문인 편지전’에 공개돼 화제가 된 이 연서는 남편 조씨가 ‘태백산맥’ 집필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살던 당시, 흰머리가 났다는 아내 김씨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보낸 것이라고 한다. 지난 40여 년을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살아왔으며, 이제는 한 몸이 된 느낌”이라는 이 부부에게, 그동안 틈틈이 주고받은 연애편지는 변치 않는 40여 년 사랑의 증거로 남아 있다.
사랑하는 여보, 초혜!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소. 당신이 떠난 순간부터 가을은 문득 깊어져 내 시간을 쓸쓸한 적막으로 채우고 있소. 당신과의 23년 세월, 세월이 쌓일수록 당신을 아내로 얻었음을 하늘에 감사하게 되오. 당신도 나를 남편으로 얻었음이 나와 같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을까봐 두렵소. 오늘 아침나절에 놀라움이 깃든 음성으로 머리칼을 헤쳐 보였을 때 나는 우리의 삶 23년을 순간적으로 떠올렸고, 부끄러운 듯 숨어 있는 흰 머리카락들마저 대견하고 사랑스러웠소. 그래서 물을 들이지 말라고 했던 것인데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우리는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에 이르러 있소.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거요. 하늘은 언제나 우리를 축복하고 보살필 것이오. 혼자 자는 잠자리가 춥겠소.
1985. 9. 22. 밤,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할 당신의 남편 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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