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는 서구적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
1990년대 말 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일었던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논쟁의 핵심은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비약적인 성장을 하던 아시아 경제가 갑자기 곤두박질친 것에 대해 서구식 민주제도와 자본주의 전통이 없는 아시아 나라들의 한계라는 비판과 공박이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었다.
정치 지도자와 학자들 간에 치열한 논박이 오갈 때 공교롭게도 이 ‘아시아적’이란 건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영화관으로 옮겨온 듯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리턴 투 파라다이스(Return to Paradise)’다. 이 영화가 작품성과 별개로 눈길을 끈 이유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동양에 대한 편견을 극대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미국의 세 젊은이가 진탕 놀다가 이중 한 명이 마약사범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나머지 두 명은 친구를 구하려고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줄거리보다 더욱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영화에 묘사된 말레이시아의 전근대적인 형벌제도였다. 70년대 영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터키가 인권이 끔찍하게 말살되는 나라로 그려진 것이 시간과 장소를 바꿔 리바이벌된 셈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싱가포르에서는 한 미국인 청소년이 태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막으려고 음으로 양으로 입김을 불어넣었지만 싱가포르 사법부는 끝내 태형을 집행했다. 자국 국민 일이라면 원인과 배경을 제쳐놓고 흥분하기 좋아하는 미국 언론들이 ‘야만국의 횡포’라며 맹비난했던 것은 불문가지다.
영화 속 장면들과 현실에서의 ‘아시아적 가치’의 논란이 겹쳐지면서 당시 많은 서구인의 눈에 다시 한번 아시아는 미개하고 음습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바로 이 아시아적 가치를 주창한 사람의 나라가 최근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입헌국가를 자칭하는 이 나라에서 일어난 권력의 세습 덕분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초대 총리의 장남인 리셴룽 부총리가 ‘드디어’ 3대 총리로 취임한 것이다. 1990년부터 재임해온 고촉통 총리가 물러난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니, 형식상으로는 직접적인 승계가 아니다. 하지만 리콴유가 은퇴 뒤에도 사실상 수렴청정을 했고, 고촉통은 ‘황태자’ 리셴룽의 정치수업이 끝날 때까지의 대리인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을 들어왔던 점을 감안하면 40년 넘게 부자에 의한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걸 이른바 리콴유가 제기한 ‘아시아적 가치’로 설명할 수 있을까? 리콴유는 “문화는 숙명이며,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며 아시아에는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신을 피력하고, 또 세계에 전파했다. 36살 때부터 사실상 총리직을 수행해온 그가 싱가포르에 적용한 모델은 민주주의 대신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플라톤의 ‘철인에 의한 지배국가’의 혼합형 같은 것이었다.
싱가포르는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아시아의 예외적 국가다. 이렇게 부국이 되는 과정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수재 리콴유의 지도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가 과연 살 만한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갈라질 것 같다. 이를테면 이 나라에서는 껌을 살 수 없다. 버려진 껌이 열쇠 구멍이나 엘리베이터 버튼 등에 끼여서 고장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1992년부터 껌 판매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일을 두고 외국 언론들은 ‘유모(乳母)의 나라’라고 비아냥거렸는데,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만약 이런 것이 유모 국가라면 나는 내가 싱가포르를 쭉 길러온 유모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겠다”고 오히려 당당히 밝히고 있다.
당시 리콴유와 함께 ‘아시아적 가치’의 듀엣을 불러댔던 이는 싱가포르와 인접한, ‘리턴 투 파라다이스’의 배경이 된 말레이시아의 독재자 마하티르였다.
할리우드가 묘사하는 아시아의 풍경이 형편없는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아시아의 몇몇 독재자들이 갖다붙이는 ‘아시아적 가치’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정당화하기 위한 합리화의 궤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의 오용(誤用)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싱가포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시아적’이 아닌, 단지 ‘싱가포르적’ 혹은 ‘리콴유적’이라 해야 마땅할 일이다.
1990년대 말 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일었던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 논쟁의 핵심은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비약적인 성장을 하던 아시아 경제가 갑자기 곤두박질친 것에 대해 서구식 민주제도와 자본주의 전통이 없는 아시아 나라들의 한계라는 비판과 공박이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었다.
정치 지도자와 학자들 간에 치열한 논박이 오갈 때 공교롭게도 이 ‘아시아적’이란 건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영화관으로 옮겨온 듯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리턴 투 파라다이스(Return to Paradise)’다. 이 영화가 작품성과 별개로 눈길을 끈 이유는 할리우드 영화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동양에 대한 편견을 극대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미국의 세 젊은이가 진탕 놀다가 이중 한 명이 마약사범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고, 나머지 두 명은 친구를 구하려고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줄거리보다 더욱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영화에 묘사된 말레이시아의 전근대적인 형벌제도였다. 70년대 영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에서 터키가 인권이 끔찍하게 말살되는 나라로 그려진 것이 시간과 장소를 바꿔 리바이벌된 셈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싱가포르에서는 한 미국인 청소년이 태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막으려고 음으로 양으로 입김을 불어넣었지만 싱가포르 사법부는 끝내 태형을 집행했다. 자국 국민 일이라면 원인과 배경을 제쳐놓고 흥분하기 좋아하는 미국 언론들이 ‘야만국의 횡포’라며 맹비난했던 것은 불문가지다.
영화 속 장면들과 현실에서의 ‘아시아적 가치’의 논란이 겹쳐지면서 당시 많은 서구인의 눈에 다시 한번 아시아는 미개하고 음습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바로 이 아시아적 가치를 주창한 사람의 나라가 최근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입헌국가를 자칭하는 이 나라에서 일어난 권력의 세습 덕분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초대 총리의 장남인 리셴룽 부총리가 ‘드디어’ 3대 총리로 취임한 것이다. 1990년부터 재임해온 고촉통 총리가 물러난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니, 형식상으로는 직접적인 승계가 아니다. 하지만 리콴유가 은퇴 뒤에도 사실상 수렴청정을 했고, 고촉통은 ‘황태자’ 리셴룽의 정치수업이 끝날 때까지의 대리인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을 들어왔던 점을 감안하면 40년 넘게 부자에 의한 통치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걸 이른바 리콴유가 제기한 ‘아시아적 가치’로 설명할 수 있을까? 리콴유는 “문화는 숙명이며, 서양식 민주주의와 인권은 문화가 다른 동아시아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며 아시아에는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신을 피력하고, 또 세계에 전파했다. 36살 때부터 사실상 총리직을 수행해온 그가 싱가포르에 적용한 모델은 민주주의 대신 조지 오웰의 ‘1984년’과 플라톤의 ‘철인에 의한 지배국가’의 혼합형 같은 것이었다.
싱가포르는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아시아의 예외적 국가다. 이렇게 부국이 되는 과정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수재 리콴유의 지도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가 과연 살 만한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갈라질 것 같다. 이를테면 이 나라에서는 껌을 살 수 없다. 버려진 껌이 열쇠 구멍이나 엘리베이터 버튼 등에 끼여서 고장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1992년부터 껌 판매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일을 두고 외국 언론들은 ‘유모(乳母)의 나라’라고 비아냥거렸는데,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만약 이런 것이 유모 국가라면 나는 내가 싱가포르를 쭉 길러온 유모라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겠다”고 오히려 당당히 밝히고 있다.
당시 리콴유와 함께 ‘아시아적 가치’의 듀엣을 불러댔던 이는 싱가포르와 인접한, ‘리턴 투 파라다이스’의 배경이 된 말레이시아의 독재자 마하티르였다.
할리우드가 묘사하는 아시아의 풍경이 형편없는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아시아의 몇몇 독재자들이 갖다붙이는 ‘아시아적 가치’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정당화하기 위한 합리화의 궤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의 오용(誤用)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싱가포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시아적’이 아닌, 단지 ‘싱가포르적’ 혹은 ‘리콴유적’이라 해야 마땅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