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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왕자병 수준의 여행
그럼에도 꿈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게 맞는 여행이라면 기꺼이 가리라. 내 마음을 어느 정도 알아주고, 내가 바라는 곳으로 가며, 현지에서 앞뒤가 궁금한 나를 위해 기꺼이 통역을 해줄 수 있는 여행. 그럼에도 돈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여행. 한마디로 ‘왕자병’ 수준의 여행을 꿈꿨다.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오랜 벗들과 일정을 맞춘 것이다. 대학 때 같이 활동했던 동문들. 한때는 세상을 더 정의롭게 하고자 몸과 마음을 다해 열정을 불태웠던 친구들. 거의 30년 만에 보는 진한 만남. 거기다 현지에서 가이드 노릇을 제대로 할 동문이 있으니 금상첨화 아닌가. 이 친구는 2년 동안 베트남 기술전문대에서 교육봉사를 해왔기에 현지 사정을 잘 안다.
여행 일정은 짧았지만 승합차를 빌려 정말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온갖 열대과일을 싼값에 먹어봤다. 바나나, 망고, 자몽, 야자, 용과, 밋(mit), 파파야, 두리안, 쫌쫌(람부탄). 내 입에서 낯선 이름들이 술술 나올 정도니 얼마나 자주 먹었을까. 바나나도 국내에서 먹던 것과는 크기도, 맛도 많이 달랐다. 대체로 작지만 맛은 참 좋았다.
파파야도 맛이 좋지만 밋은 과일이 큼직한데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달달하면서도 쫄깃쫄깃 아삭하다. 더운 나라 여행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는 향기와 식감이랄까. 영어로는 잭프루트(jackfruit)라고 한단다. 우리말로는 ‘큰빵나무’. 나는 한 글자 ‘밋’이란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렇게 여러 열대과일에 익숙해질 무렵 한 사원을 찾았다. 훼(Hue) 시에 있는 티엔무 사원(Chu`a Thien Mu). 한 바퀴 둘러보는데 밋이란 나무에 달린 과일과 꽃이 눈에 띈다. 기다란 수박 같은 과일이 땅바닥이 아닌, 높은 나무에 여기저기 매달리다니 신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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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일복 많아
농사꾼 처지에서 이 얼마나 반가운가. 바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일단 꽃을 향해 셔터부터 눌렀다. 이 나무는 대충 헤아려도 10m 높이. 내 눈에 들어온 밋과 밋꽃은 대략 3m쯤 높이다. 그 밖에도 줄기를 따라 여기저기 굵어가는 열매가 보인다.저 꽃을 가까이서도 찍어야 하는데 맞춤한 사다리를 구할 길이 없다. 함께 간 동문들 가운데 키가 제법 크고 뚝심도 좋은 친구한테 목말을 태워달라 했다. 그리하여 가까이서 본 밋 수꽃은 피었다 져 거무튀튀하고, 암꽃은 그냥 밋밋했다.
밋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한 동문 가운데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안식년 기간이지만 전날에는 베트남 꾸이년(Quy Nhon) 해변에서 지역 젊은이들과 함께 쓰레기줍기운동을 펼칠 정도로 일중독이다. 이 친구가 이날 또 일을 벌였다. 우리 딸이 여행 기념으로 열대과일을 먹고 싶다는 말이 씨가 됐다. 생과일은 반입금지 품목이고, 말린 과일이 아니라면 식물검역소를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말려야 말린 걸로 쳐줄까. 여기저기 알아보니 씨를 뺀 생과를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과즙이 나오지 않을 정도면 된단다. 다행이 베트남은 막 우기를 지나 건기에 접어들었고, 마침 한국도 대한 추위라 쉬이 상할 거 같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미 늦은 밤이라 숙소 가까이 있는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큰 마트 두 군데를 찾아 들렀지만 모두 허탕. 다 팔리고 없단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오는데 길거리 야시장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게 아닌가. 큰 밋 하나를 통째로 샀다. 숙소로 돌아와 곧장 말리기 시작했다. 껍질을 벗긴 다음 씨앗을 분리하고 과육만 펼쳐 말리면 된다. 일을 다 끝내고 나니 밤 12시가 훌쩍 넘었다. 나는 일복을 타고났나 보다. 결국 일상 같은 여행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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