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명종 때 문신인 김극기는 선암사에 대해 이렇게 읊었다. 2011년이 시작되고 벌써 한 달여가 흘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마음속 묵은 감정을 부단히 비웠건만 어느새 가슴에는 근심이 켜켜이 쌓였다. 1월의 끝자락에 들뜬 근심을 다 지운다는 선암사를 찾기 위해 전남 순천 조계산(884m)에 갔다.
조계산에는 조계종 총림인 송광사(松廣寺)와 태고종 총림인 선암사가 모두 자리한다. 산 하나가 각 종파의 으뜸 사찰을 품고 있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다. 선암사는 조계산 동쪽 장군봉 아래에, 송광사는 조계산 서쪽 연상봉 밑에 고즈넉하게 자리한다. 기자는 동서(東西)를 가로지르는 선암사~송광사 숲길(6.5km)을 걸을 예정이다. 이 길은 두 절의 스님이 오가는 오솔길로도 불린다. 스님들은 이 골짜기 길을 오가며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리라.
선암사 입구에 다다르자 형형색색의 등산복 재킷을 입은 이들로 시끌벅적하다. 등산화, 스틱, 아이젠 등 완벽한 등산 차림을 한 것으로 보아 외지인인 듯하다. 집에서 방금 나온 듯한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간편한 운동화, 부츠 등을 신은 ‘사람도 보인다. 인근 주민인 듯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하다. 순천시민에게 조계산은 큰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친근한 산이다. 기자와 동행한 순천 출신의 인턴 사진기자도 조계산을 수차례 들렀다고 한다.
선암사에 이르려면 시냇물을 건너야 한다. 그 건널목에 놓인 돌다리가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다. 길이 14m, 높이 4.7m의 무지개다리로 다리 아치 안쪽에는 용머리가 시냇물을 향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얼음 아래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정겹다. 승선교는 속세와 신선의 세계를 구분해주는 다리라는 의미. 나도 모르게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게 된다.
차갑고 청량한 바람이 가슴속 깊이 들어와 일렁인다. 선암사는 편백나무로 둘러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숲이 우거져 있다. 스님이 다가와 편백나무를 꼭 한번 안고 갈 것을 권한다. 편백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가 마음 바닥까지 맑게 만드는 느낌이다. 선암사의 시작은 명확하지 않다. ‘선암사 사적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 7년(529) 아도화상이 조계산 중턱에 해천사를 지었다가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현 위치에 다시 절을 짓고 선암사로 불렀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선암사 해우소
선암사 해우소. 2층 구조에 살창을 두어 악취가 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중략)/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정호승의 ‘선암사’ 중에서)
절 마당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으니 스님 한 분이 다가와 달마전의 수각(水閣)은 보았느냐고 묻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각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달마전에는 뒤편 야생차밭에서 흘러들어온 약수를 담는 4개의 석함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맨 위에 있는 큰 사각형 석함에 물이 괴면 부처님에게 올리는 청수, 차를 끓일 물로 쓴다. 그 옆에 있는 타원형 석함으로 내려온 물은 스님과 대중이 마시는 물이다. 그 옆의 조그마한 둥근 석함으로 다시 흘러들어온 물은 밥을 짓고 채소를 씻는 데 쓰고, 마지막 가장 작은 석함에 괸 물은 몸을 씻고 빨래를 하는 데 쓴다. 수각의 의미를 듣고 나니, 보지 못하고 갔으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싶다.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가는 데는 보통 3시간 반~4시간이 걸린다. 산 곳곳에 눈이 쌓였으니 좀 더 시간이 걸릴 터. 해가 지기 전에 송광사에 도착할 요량으로 발걸음을 서두른다. 선암사를 벗어나자 이내 편백나무 삼림욕이 다시 발걸음을 붙잡는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너그럽게 사람을 반기는 숲에서 한참 동안 몸과 마음을 맡겨본다. 조계산은 흙산으로 길이 보드랍고 산세 또한 부드럽다. 산을 잘 타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은 산이다. 굴피나무, 노각나무, 합다리나무 등 갖가지 나무와 그 위에 앉은 새들이 보기에도 정겹다. 끊이지 않고 들리는 계곡물 소리는 마음뿐 아니라 눈까지 상쾌하게 한다. 겨울 어느 날에 내린 눈이 아직도 녹지 않아 풍광이 더 아름답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눈을 밟고 간 탓에 길은 매우 미끄럽다. 선암사에서 큰굴목재(선암사굴목재)에 이르는 길은 오늘 코스 중 가장 가파르다. 겨울에 이곳을 찾는다면 아이젠을 가져가는 것이 안전하다.
큰굴목재에 도착하니 앉아 쉬고 싶어진다. 재킷을 벗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 있자니 금세 추워진다. 10여 분만 더 가면 보리밥집이 나온다고 알려주는 표지판을 보자 다시 힘이 난다. 보리밥집에서는 1인당 6000원 하는 산채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 모자라면 언제든 말하라고 당부하는 주인아주머니의 인심이 넉넉하다. 보리밥에 10여 가지 산나물을 넣고 고추장, 참기름 넣어 쓱쓱 비벼먹으니 술술 잘도 넘어간다. 함께 나온 호박탕은 달콤하고 시원한 것이 별미다. 가마솥에서 팔팔 끓인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면 어느새 배는 두둑해져 다시 떠날 힘이 생긴다. 보리밥집에 도착하면 절반 가까이 걸은 셈. 주인아주머니는 이곳에서 송광사까지는 거의 내리막, 평지길이니 왔던 것보다 수월할 것이라고 일러준다.
가는 길 곳곳에 숯가마터가 눈에 띈다. 옛날 조계산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숯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그제야 걷는 동안 각종 참나무가 유난히 많았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조계산은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이기도 하다. 곳곳에서 빨치산의 은신처를 발견할 수 있다. 가끔 구식 총과 실탄을 발견하기도 한다는데, 산이 오통 눈으로 덮인 탓인지 눈을 크게 떠도 찾기가 어려웠다.
(왼쪽) 송광사 대웅보전. 약 357m2에 이르는 크기와 亞자형 평면구조가 이색적이다. (오른쪽) 선암사 수각. 야생차밭에서 내려온 물이 4개의 석함을 채운다.
소나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면 송광사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송광사라는 이름의 ‘송’자도 소나무 송(松)자다. 그만큼 송광사에는 소나무가 많다. 우리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송광사는 신라시대에는 길상사, 고려 시대에는 수선사로 불리다 조선시대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송광사는 법정스님(1932~2010)이 머문 절로도 유명하다. 법정스님은 1975년부터 1992년까지 17년 동안 송광사 불일암에 머물렀다. 송광사 대웅보전 앞에는 법정스님의 시구와 사진을 담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법정스님을 그리워하는 글귀가 적힌 기왓장들도 눈에 띈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 등 16국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데, 그래서인지 스님 사관학교로 불린다. 현재 송광사에서는 130여 명의 스님이 공부 중인 것이라 알려졌다. 나이 지긋한 스님, 젊은 스님, 푸른 눈의 외국인 스님 등이 차분한 듯 활기차게 절 마당을 오간다. 고요함 속에서 에너지가 느껴진다. 대웅보전 앞에는 매달 ‘이달의 선시’를 내건다.
“마음이 온갖 경계를 따라 굽이치나니/ 굽이치는 그 자리가 실로 그윽하다네/ 이 흐름을 따라 본성을 알아버리면/ 기쁠 것도 없고 또한 슬플 것도 없다네.”(송광사 ‘이달의 선시’)
이는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22대 조사인 마나라 존자(尊者)가 그의 제자 학늑나 존자에게 설(說)해준 게송(偈頌)이라 한다. 사람은 슬픔, 기쁨 등의 감정으로 울고 웃지만, 그것은 생각의 파동(波動)일 뿐 정체(正體)가 없다는 뜻이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을 잃은 듯 행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다. 봄이 오면 다시 이곳을 찾겠다는 다짐을 하고 송광사에 작별을 고한다.
[ Basic info. ]
☞ 교통편
대중교통 | 호남고속터미널(6시 10분부터 30~40분 간격으로 순천까지 운행, 4시간 30분 소요) → 순천 종합터미널(시내버스 30~40분 간격) → 선암사
자동차 | 호남고속도로 → 승주IC → 선암사
☞ 코스
선암사 → 큰굴목재 → 조계산 보리밥집 → 작은굴목재 → 송광사(6.5km, 3시간 30분~ 4시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