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전경.
헌재의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위헌 결정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번 결정을 계기로 헌재가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기관으로 발돋움했다는 점일 것이다.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은 관습헌법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손에 쥔 헌재를 견제할 적절한 제도조차 없다는 점에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헌재는 1987년 민주화 열풍을 자양분으로 탄생한 최고의 헌법 수호 기관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 수호의 최후 보루’라는 취지와 달리, 실제 헌재는 대법원에 밀려 헌법 체계의 한쪽에 물러서 있었다. 그런 헌재가 다시 태어난 첫 계기는 2004년 봄 16대 국회의 마지막 승부수인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가 발단이 됐다.
‘국민투표’ 아닌 ‘헌정 개정’ … 수도 이전 의지 아예 꺾어
1차 보(保)-혁(革) 대결에서 노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헌재는 즉각 2차 대결에서는 노대통령의 굴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사건이 바로 지난 여름에 벌어진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 존폐 논쟁. 8월26일, 헌재는 국보법 제7조의 ‘찬양 고무죄’에 대해 전원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리며 “국보법은 형법상 내란죄 등 규정의 존재와 별도로 독자적 존재 의의가 있다”고 결정했다. 이 조항은 한나라당조차 국보법의 대표적 문제점으로 결론 내린 부분. 또한 헌재는 “입법부가 헌재의 결정과 국민 의사를 수렴하여 입법 과정에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여 입법권 침해 논쟁까지 불러일으켰다.
노대통령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헌재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듯한 모습을 내보였다. 법조계는 노대통령이 한 TV 대담에서 “국보법은 현행 형법으로 대치 가능하다”는 발언이 헌재와 대법원을 공개적으로 망신 준 사건으로 보고 있다. 상대가 대통령이라지만 법조 경력이 일천한 까마득한 후배 아닌가. 결국 3차 전쟁인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헌법소원에서는 즉시 노대통령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며 정치적 대립각을 분명히 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소장판사는 “돌이켜보면, 헌재의 국보법 합헌 판결은 노대통령에게 헌재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시위였는데, 결과적으로 노대통령이 무시하자 헌재는 권위를 보여줄 ‘거리’를 찾았을 것이다”고 말한다. 과연 헌재는 노대통령을 향한 정치적 비수를 들이댄 것일까.
이번 헌재의 결정이 논란을 빚는 까닭은, 절대다수 법조인들의 예상과 달리 ‘정치적’인 결정이란 비난을 감내하면서까지 여권의 정책 추진을 완벽하게 좌절시킨 것. 노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정권의 명운을 걸었다”고까지 천명했지만, 헌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청와대에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과거와 같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게다가 ‘충청권 행정수도 이전’은 노대통령이 이미 대선공약으로 제시했으며, 지난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정당한 입법 절차를 거친 법안이었다. 현행 성문법 체계에서는 ‘신행정수도건설위특별법’은 시비 대상으로 부적절했다. 뒤늦게 반대 목소리를 흘리고 나선 야당조차 제대로 된 당론조차 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여당 의원들을 더욱 경악시킨 점은 헌재가 “국민투표를 통해 수도 이전을 추진하라”(김영일 재판관)는 결론이 아닌 “‘수도=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하라”(윤영철 재판관 외 6인)며, 아예 현 정권의 수도 이전 의지를 근본적으로 꺾어버린 것. 국민투표라면 대국민 홍보라도 시도해보겠지만, 과반을 간신히 넘는 현 집권 여당의 처지에서 3분의 2 이상의 국회 찬성을 필요로 하는 헌법 개정은 수도 이전의 포기를 뜻한다. 우리당 한 의원이 “한나라당을 극복했더니, 헌재가 버티고 있었다”고 한탄한 것이 이해될 만하다.
헌재는 최근 일련의 결정으로 의도했건 아니건, 현 정권과 각을 세우게 됐다. 현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에서는 헌재를 포함한 사법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현 정권 비판 세력에는 헌재가 헌법 수호의 최후 보루로 떠올랐다. 헌재의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