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아래까지 흘러내린 백발이 한결 자유로워 보였다. 두 손은 우주를 품었고 목소리는 세월을 담았다. 카랑카랑 울리는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흰옷을 입은 그의 모습이 마치 신선 같았다. 12월 2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콘서트 무대에 선 신중현의 풍모가 꼭 그랬다.
160cm가 안 되는 단신의 부도옹 옆을 세 아들이 지켰다. 장남 신대철과 차남 신윤철이 기타를, 막내 신석철이 드럼을 쳤다. 가족 모임이 곧 콘서트가 되는 집안이다. 어디 평범한 집안인가. 신대철은 시나위, 신윤철은 서울전자음악단, 신석철은 한국 최고 드럼세션 자리를 이끌었다. 말 그대로 우월한 유전자 집합이다. 세 아들의 지원을 받은 신중현의 기타 연주와 노래는 일종의 경이였다.
실험성, 대중성, 음악성 모두 갖춘 1인자
한국 록 역사를 성서에 비유한다면, 신중현의 존재는 구약 중심에 선 모세에 다름 아니다. 아니, 창세기부터 출애굽기에 이르는 그 막대한 시간이 신중현의 행보와 겹쳐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8세가 되던 1955년 미8군 무대에 히키 신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한 그는 이내 미군들이 인정하는 기타 연주자가 됐다. 이렇다 할 산업도, 대중문화도 없던 당시 한국에서 미8군 무대의 스타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 대중에게 자기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1962년 한국 최초 밴드라 할 수 있는 ‘애드 훠(ADD 4)’를 결성해 ‘빗속의 여인’으로 데뷔했다. 이후 그의 이름은 곧 히트곡과 동의어였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펄 시스터스, 김추자, 김정미, 장현, 이정화 등을 발굴해 스타로 등극시켰다. ‘거짓말이야’ ‘커피 한 잔’ ‘꽃잎’ ‘봄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불멸의 명곡들을 만들었다. 이 노래들은 단순한 히트곡이 아니다.
신중현은 당시 한국 음악계 그 누구보다 서구의 음악적 흐름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그것을 한국적 문법으로 소화해냈다. 지금은 상식이 된 밴드 구성, 즉 기타-베이스-드럼 시스템을 정립한 이는 비틀스다. 비틀스는 1963년 데뷔해 이듬해 미국에 진출, ‘비틀 마니아’ 신드롬을 낳았다. 신중현이 이끄는 애드 훠의 데뷔앨범은 비틀스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전인 1964년 발매됐다. ‘봄비’로 대표되는 솔(Soul) 스타일의 음악을 1960년대 중반에, ‘커피 한 잔’ 같은 사이키델릭을 1960년대 후반에 발표했다. 모두 서구에서조차 막 발아하던 장르들이다.
프로듀서가 아닌 가수로서 신중현을 정상에 올려놓은 ‘미인’은 당시 오일쇼크로 급격히 위축됐던 한국 음반산업을 지켜낸, 말 그대로 ‘국민 히트곡’이었다. 국악 음계를 멜로디로 활용한 ‘한국적 록’의 시작이자 완성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여명기와 발전기에 실험, 트렌드,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아우른 단 한 사람이 바로 신중현이다.
그런 신중현의 음악을 들을 때면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유신정권이 아니었다면 지금 한국 대중음악은 더욱 멋지지 않았을까. 1972년 유신 선포와 함께 박정희 정권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신중현에게 유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라고 했다. 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 대신 ‘아름다운 강산’을 발표했다. 당연히 미운 털이 박힐 대로 박혔다. 이후 그가 노래를 발표하는 대로 검열 당국은 족족 금지곡 판정을 내렸다. 1974년 ‘미인’이 대히트해 기사회생할 때까지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하지만 ‘미인’으로 전화위복을 한 직후인 1975년 대마초 파동이 터진다. 이 사건으로 신중현은 ‘마약왕’이라는 오명과 함께 모든 활동을 정지당했다. 신중현뿐 아니라 당시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대부분의 록 뮤지션이 불령선인 취급을 받으며 구속되거나 활동을 중단했다. 대중음악 뿌리가 뽑힌 셈이다. 이후 록이 비운 자리를 트로트와 디스코가 채웠다.
와이어 달고 날아오른 록왕
이번 공연은 신중현의 지난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집대성한 것으로, 한국 록 역사의 고밀도 다이제스트 판이었다. 그는 2006년 공식적으로 은퇴했으나, 2009년 일렉트릭 기타의 명가 펜더사에서 아시아인에게는 최초로 그에게 시그너처 모델을 헌정하면서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이번 공연 1부는 ‘빗속의 여인’부터 ‘미인’까지 주요 히트곡으로 꾸몄다. 9월 미국 공연에서 연주한 곡들이 2부를 채웠다.
일반적인 공연과 달리 대형 PA(Public Address) 스피커 대신 기타 앰프 몇 대를 관객용 스피커로 활용했다. 진공관을 통해 울려 퍼지는 아날로그 사운드가 공연장을 메웠다. ‘The Guitarist’라는 공연 제목답게 신중현의 기타 소리를 만끽할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이었다. 이런 사운드를 바탕으로 신중현의 연주는 지난 어떤 공연 때보다 카랑카랑했고 섬세했으며 마음을 울렸다. 대철과 윤철 두 아들에 비해 힘은 달릴지 모르나 울림은 압도적이었다. 마치 왕자들 앞에 묵묵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경의를 이끌어내는 늙은 왕 같았다.
본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 요청과 함께 그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김정미의 노래로 잘 알려진 ‘바람’이 앙코르곡이었다. 원곡과 달리 긴 사이키델릭 잼 형태로 다시 편곡한 이 노래의 정점에서 그는 몸에 와이어를 매달고 날아올랐다. 암전 상태에서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의 빛이 그의 활강을 스톱 모션처럼 비쳤다. 기타 3대가 빚어내는 몽환적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주인공은 단연 허공에서 연주하는 그의 손이었다.
그 모습은 승천이었다. 상업적 성공에 휘둘리지 않고 권력의 탄압도 지울 수 없는 위대한 음악적 성취를 이룬 한 뮤지션이 기타의 신선이 돼 역사의 안개 위로 승천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연주를 들으며 간절히 바랐다. 부디 이 위대한 뮤지션의 공연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
160cm가 안 되는 단신의 부도옹 옆을 세 아들이 지켰다. 장남 신대철과 차남 신윤철이 기타를, 막내 신석철이 드럼을 쳤다. 가족 모임이 곧 콘서트가 되는 집안이다. 어디 평범한 집안인가. 신대철은 시나위, 신윤철은 서울전자음악단, 신석철은 한국 최고 드럼세션 자리를 이끌었다. 말 그대로 우월한 유전자 집합이다. 세 아들의 지원을 받은 신중현의 기타 연주와 노래는 일종의 경이였다.
실험성, 대중성, 음악성 모두 갖춘 1인자
한국 록 역사를 성서에 비유한다면, 신중현의 존재는 구약 중심에 선 모세에 다름 아니다. 아니, 창세기부터 출애굽기에 이르는 그 막대한 시간이 신중현의 행보와 겹쳐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8세가 되던 1955년 미8군 무대에 히키 신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한 그는 이내 미군들이 인정하는 기타 연주자가 됐다. 이렇다 할 산업도, 대중문화도 없던 당시 한국에서 미8군 무대의 스타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 대중에게 자기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1962년 한국 최초 밴드라 할 수 있는 ‘애드 훠(ADD 4)’를 결성해 ‘빗속의 여인’으로 데뷔했다. 이후 그의 이름은 곧 히트곡과 동의어였다. 1960년대에서 7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펄 시스터스, 김추자, 김정미, 장현, 이정화 등을 발굴해 스타로 등극시켰다. ‘거짓말이야’ ‘커피 한 잔’ ‘꽃잎’ ‘봄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불멸의 명곡들을 만들었다. 이 노래들은 단순한 히트곡이 아니다.
신중현은 당시 한국 음악계 그 누구보다 서구의 음악적 흐름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와 동시에 그것을 한국적 문법으로 소화해냈다. 지금은 상식이 된 밴드 구성, 즉 기타-베이스-드럼 시스템을 정립한 이는 비틀스다. 비틀스는 1963년 데뷔해 이듬해 미국에 진출, ‘비틀 마니아’ 신드롬을 낳았다. 신중현이 이끄는 애드 훠의 데뷔앨범은 비틀스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전인 1964년 발매됐다. ‘봄비’로 대표되는 솔(Soul) 스타일의 음악을 1960년대 중반에, ‘커피 한 잔’ 같은 사이키델릭을 1960년대 후반에 발표했다. 모두 서구에서조차 막 발아하던 장르들이다.
프로듀서가 아닌 가수로서 신중현을 정상에 올려놓은 ‘미인’은 당시 오일쇼크로 급격히 위축됐던 한국 음반산업을 지켜낸, 말 그대로 ‘국민 히트곡’이었다. 국악 음계를 멜로디로 활용한 ‘한국적 록’의 시작이자 완성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여명기와 발전기에 실험, 트렌드,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아우른 단 한 사람이 바로 신중현이다.
그런 신중현의 음악을 들을 때면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유신정권이 아니었다면 지금 한국 대중음악은 더욱 멋지지 않았을까. 1972년 유신 선포와 함께 박정희 정권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신중현에게 유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라고 했다. 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 대신 ‘아름다운 강산’을 발표했다. 당연히 미운 털이 박힐 대로 박혔다. 이후 그가 노래를 발표하는 대로 검열 당국은 족족 금지곡 판정을 내렸다. 1974년 ‘미인’이 대히트해 기사회생할 때까지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견뎌야 했다.
하지만 ‘미인’으로 전화위복을 한 직후인 1975년 대마초 파동이 터진다. 이 사건으로 신중현은 ‘마약왕’이라는 오명과 함께 모든 활동을 정지당했다. 신중현뿐 아니라 당시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대부분의 록 뮤지션이 불령선인 취급을 받으며 구속되거나 활동을 중단했다. 대중음악 뿌리가 뽑힌 셈이다. 이후 록이 비운 자리를 트로트와 디스코가 채웠다.
와이어 달고 날아오른 록왕
이번 공연은 신중현의 지난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집대성한 것으로, 한국 록 역사의 고밀도 다이제스트 판이었다. 그는 2006년 공식적으로 은퇴했으나, 2009년 일렉트릭 기타의 명가 펜더사에서 아시아인에게는 최초로 그에게 시그너처 모델을 헌정하면서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 이번 공연 1부는 ‘빗속의 여인’부터 ‘미인’까지 주요 히트곡으로 꾸몄다. 9월 미국 공연에서 연주한 곡들이 2부를 채웠다.
일반적인 공연과 달리 대형 PA(Public Address) 스피커 대신 기타 앰프 몇 대를 관객용 스피커로 활용했다. 진공관을 통해 울려 퍼지는 아날로그 사운드가 공연장을 메웠다. ‘The Guitarist’라는 공연 제목답게 신중현의 기타 소리를 만끽할 수 있는 최선의 환경이었다. 이런 사운드를 바탕으로 신중현의 연주는 지난 어떤 공연 때보다 카랑카랑했고 섬세했으며 마음을 울렸다. 대철과 윤철 두 아들에 비해 힘은 달릴지 모르나 울림은 압도적이었다. 마치 왕자들 앞에 묵묵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경의를 이끌어내는 늙은 왕 같았다.
본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 요청과 함께 그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김정미의 노래로 잘 알려진 ‘바람’이 앙코르곡이었다. 원곡과 달리 긴 사이키델릭 잼 형태로 다시 편곡한 이 노래의 정점에서 그는 몸에 와이어를 매달고 날아올랐다. 암전 상태에서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의 빛이 그의 활강을 스톱 모션처럼 비쳤다. 기타 3대가 빚어내는 몽환적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주인공은 단연 허공에서 연주하는 그의 손이었다.
그 모습은 승천이었다. 상업적 성공에 휘둘리지 않고 권력의 탄압도 지울 수 없는 위대한 음악적 성취를 이룬 한 뮤지션이 기타의 신선이 돼 역사의 안개 위로 승천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연주를 들으며 간절히 바랐다. 부디 이 위대한 뮤지션의 공연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