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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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가 오말리를 찾아가는 이유

전격 은퇴 후 샌디에이고에서 야구경영자 수업 제2의 도전

  • 김도헌 스포츠동아 스포츠1부 기자 dohoney@donga.com

    입력2012-12-10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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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호가 오말리를 찾아가는 이유

    11월 30일 은퇴 기자회견을 가진 ‘코리안 특급’ 박찬호.

    메이저리그에서 17년간 124승, 아시아 선수 최다승이란 금자탑을 세웠다. 그리고 2011년 일본에서 1승, 마지막으로 2012년 한국에서 5승, 19년간 한미일 프로야구에서 통산 130승을 거뒀다. 그가 걸어온 길은 한국 야구 역사 그 자체였다.

    한국인의 자긍심이자, 한국 야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박찬호(39)가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올 시즌 고향팀 한화에서 뛴 박찬호는 최근 팬들의 탄성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제2 야구인생을 선택했다.

    # 고심 끝에 결정한 은퇴

    10월 3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한화와 KIA전에 시즌 마지막 등판한 박찬호는 “한국에 올 때부터 오래 선수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몸도 아프고, 나 때문에 자리를 찾지 못할 후배들도 생각해야 한다”며 은퇴를 시사했다. 그러나 은퇴를 선언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시즌 종료 후 미국으로 건너간 박찬호는 멘토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현역 생활을 연장하고 싶은 욕심이 다시 생기기도 했다. 그래서 쉬는 기간에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체력에 대한 자신감과 야구를 향한 식지 않는 열정, 끈끈한 동료애를 보여준 한화 후배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벽에 막혀 최종적으로 은퇴를 결정했다. 그는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마흔한 살이다. 물론 올해 불혹의 나이에도 최고 구속 149km의 빠른 볼을 던졌고, 23경기에 등판해 121이닝을 던지며 건재를 과시했지만 평균 구속은 140km대 초반이었다. 시속 160km 광속구를 던졌던 전성기에 비해 구위가 떨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더욱이 수년간 고질적인 허리통증을 비롯한 잔부상에 시달렸다. 야구선수라는 직업 특수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아내 박리혜(37) 씨와 두 딸 애린(6), 세린(4) 양에게 든든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빠로서 좀 더 충실하고 싶은 마음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최근 확연히 달라진 팀 분위기도 그의 은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새로 지휘봉을 잡은 김응룡 감독이 사실상 그의 조속한 거취 표명을 압박하며 은퇴를 종용했던 것. 사실 김 감독 태도가 박찬호의 은퇴 결정에 주된 이유가 됐다는 게 주변 지인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 박찬호, 프로 19년 발자취

    그의 친정팀이기도 한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입단을 눈앞에 둔 ‘괴물 투수’ 류현진(한화)은 빅리그에서 박찬호처럼 활약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대부분 “박찬호 같은 스타는 한국에서 더는 나오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공주고 3학년 때 147km의 빠른 볼을 뿌렸던 박찬호는 한양대 재학 중 LA 다저스에 입단, 1994년 4월 8일 다저스타디움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빅리그 통산 17번째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주인공이 됐다. 1996년 4월 7일 시카고 커브스전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첫 승을 거뒀고,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이듬해 14승을 시작으로 2000년 18승으로 정점을 찍었고, 2001년까지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실의에 빠져 있던 우리 국민은 빅리그를 호령하는 그의 모습에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

    2001시즌 종료 후 프리에이전트(FA)가 된 박찬호는 5년 총액 65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했다. 그러나 이내 시련이 찾아왔다. 2002년부터 성적이 하향세를 탔다. 그 덕분에 유니폼도 자주 갈아입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뉴욕 메츠를 거쳐 LA 다저스로 돌아갔고, 다시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했다가 뉴욕 양키스에 몸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태극마크’라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승리투수가 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6년에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 마무리투수로 4강 신화를 함께 썼다. 세월의 무게에도 박찬호는 여전히 ‘한국 야구’와 동의어였다. 마지막 소속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선 새 이정표를 세웠다. 2010년 10월 2일 플로리다전에서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째를 올려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보유했던 아시아 선수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1994년부터 17시즌 동안 쌓아올린 금자탑이었다.

    일본 오릭스에서 2011년을 보냈던 그는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뤘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만든 예외 규정에 힘입어 고향팀 한화에 입단했던 것. 영웅의 귀환에 한국 야구계는 들썩거렸다. 관심도 쏟아졌다. 그 역시 기대에 부응했다. 시즌 첫 등판인 4월 12일 청주구장에서 열린 두산전에서 6.1이닝 2실점으로 첫 승을 거뒀고, 이후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5승10패, 방어율 5.06을 기록했다.

    # 제2 출발지는 다시 미국

    박찬호는 야구를 통해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미국에서 17시즌을 뛰는 동안 받은 순수 연봉만 8545만6946달러에 이른다. 이것만 해도 900억 원을 훌쩍 넘는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지하 4층, 지상 13층 규모의 일명 ‘박찬호빌딩’도 갖고 있다. 현 시세는 4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에서 나오는 한 해 임대료 수입만 10억 원 수준이라고 한다. 올해 한화에서 받은 연봉은 모두 유소년야구발전기금으로 내놓고 ‘무보수 활동’을 했지만, 야구로 벌어들인 돈만 1000억 원이 넘을 정도로 그는 ‘야구 재벌’이다. 풍부한 자금력에 20년 가까운 미국 생활로 다양한 인맥도 쌓았다. 박찬호가 지도자가 아닌 야구경영자로서 제2 도전에 나서기로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박찬호는 곧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1994년 자신을 메이저리거로 키운 ‘양아버지’ 피터 오말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구단주와 다시 손을 잡는다. 박찬호는 이전부터 야구경영과 행정, 구단운영, 관리 등에 관심이 많았다. 앞으로 미국과 한국 야구의 가교 노릇을 맡고 싶다는 희망도 피력했다. “오말리의 조언, 그리고 오말리를 통해 여러 가지를 시작할 것 같다. 선수는 아니지만 샌디에이고와 더 많은 인연을 이어갈 것 같다”고 밝힌 것도 그래서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스타 출신 선수들처럼 샌디에이고에서 구단주 특별보좌역 등의 직함을 달고 본격적으로 야구경영 수업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미국에 머물겠지만 국내 야구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도 예상된다. 박찬호는 “스포츠가 산업으로 자리 잡아야 선수 인권, 그리고 선수와 팬의 가치가 모두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프로야구 산업화에 일조하고 싶다”는 바람도 갖고 있다. 올해 12회째를 맞은 ‘박찬호기 초등학교 야구대회’와 수많은 후배에게 혜택을 준 ‘박찬호 야구꿈나무 장학금 전달’도 계속할 계획.

    나아가 자기 이름을 내건 야구박물관을 세울 계획도 갖고 있다. 한화팀 후배 장성호가 ‘2000안타 기념 방망이’를 박찬호에게 미리 건넨 것도 언젠가 건립될 박찬호 야구박물관에 기증하기 위함이라고. 박찬호 야구박물관은 그의 야구 인생을 담은 여러 유니폼은 물론, 미국에서 함께 뛴 빅리거 동료들을 포함해 국내 스타플레이어의 기념물들을 모은 역사적 박물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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