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800년까지 지구상의 실질적 최강국은 중국이었다. 당시 2억 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를 차치하더라도 중국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래서 중국인은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겼고, 심지어 청나라 황제가 교황청 사신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부심의 근거를 인구수로만 치부할 순 없다. 당시 중국 패권의 핵심은 의외로 ‘문화’의 우월성에 있었을지 모른다. 중국은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나라로 제아무리 긴 뜻도 몇 자의 자구로 정리한다. 중국의 모든 것이 함축된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한마디에서 보듯, 표의문자는 추론과 합의를 중시한다. 과학기술이 전면에 부각된 산업혁명 이전의 질서에서 중국의 문자는 그 자체가 철학이 된다.
그래서인지 중국인은 지금도 인연과 정리를 중시하고, 합의와 논쟁을 즐긴다. 그 과정에서 최선의 길을 이끌어내는 데 익숙하다. 현대 중국의 발전도 어떻게 보면 탁월한 ‘어젠다의 힘’일 수 있다. 중국의 지도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젠다를 설정하고 실천하는 힘이 세계 최강이다. 비록 민주적 절차로 뽑히진 않지만 중국의 지도부 자리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인재를 선발해 중앙에서 기회를 주고 능력을 보인 검증된 자에게만 허락된다. 혁명 1세대인 마오쩌둥 이후의 지도부는 새로운 내부합의를 거쳐 탄생했다. 마오에서 덩샤오핑,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지도부 선출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치열한 권력암투도 없고, 인민의 민심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는 검증된 지도부의 자긍심과 그에 조응하는 애국심의 발로다.
이런 중국에서 3세대 지도부인 후진타오 체제는 뜻밖에 ‘화해사회’를 내세운다. 마오의 혁명론, 덩사오핑의 선부론(先富論)에 이은 세 번째 어젠다다. ‘화해사회’라는 말에는 중국의 문자답게 많은 중의적 의미가 녹아 있다. 먼저 한 지역이 잘살면 다른 지역도 잘살게 된다는 선부론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이는 지역과 계층, 민족 간의 격차를 가져왔다. 후진타오는 ‘화해사회’로 그런 문제를 연착륙시키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후진타오는 ‘농업, 농민, 농촌’이라는 3농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다수 인민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선부론의 바탕 위에서 이제 그 물을 메마른 땅에 뿌리겠다는 것. 물론 그 안에는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화해사회’라는 미소 뒤에는 ‘동북공정’과 ‘서남공정’으로 소수민족의 독립 명분을 제거하고,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있다. 흡사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꽃을 든 모습이다.
중국 지도부가 당면한 현실은 첩첩산중이다. 극심한 부의 격차와 계층의 분화, 도시와 농촌의 발전 격차 등은 체제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중국이 모순에 빠지고, 내부 균열이 일어나 결국 붕괴하리라는 서방의 희망 어린 관측이 현실화하기에는 중국 지도부의 역량이 너무 노회하다. 중국이 몇 번의 홍역을 치르며 다시 세계의 강국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래도 우세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책 ‘후진타오와 화해사회’(동아시아 펴냄)는 중국 지도부의 이러한 고민과 그들의 역량, 모순, 가능성을 두루 일별한다. 특히 지도부의 생각을 추상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나온 문건들을 정교하게 교직해 일정한 논거를 제시한다. 이 때문에 저자의 논지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알다시피 중국은 우리와 ‘순망치한’의 관계다. 심지어 글로벌 금융위기마저 중국이라는 우산을 통해 모면할 수 있었던 우리다. 굳이 수천 년의 역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중국을 더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 중국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책이 문건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고,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특성상 다소 가독성이 떨어지는 점, 반복되는 사안이 많은 점은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은 지금도 인연과 정리를 중시하고, 합의와 논쟁을 즐긴다. 그 과정에서 최선의 길을 이끌어내는 데 익숙하다. 현대 중국의 발전도 어떻게 보면 탁월한 ‘어젠다의 힘’일 수 있다. 중국의 지도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젠다를 설정하고 실천하는 힘이 세계 최강이다. 비록 민주적 절차로 뽑히진 않지만 중국의 지도부 자리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인재를 선발해 중앙에서 기회를 주고 능력을 보인 검증된 자에게만 허락된다. 혁명 1세대인 마오쩌둥 이후의 지도부는 새로운 내부합의를 거쳐 탄생했다. 마오에서 덩샤오핑,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지도부 선출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치열한 권력암투도 없고, 인민의 민심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는 검증된 지도부의 자긍심과 그에 조응하는 애국심의 발로다.
이런 중국에서 3세대 지도부인 후진타오 체제는 뜻밖에 ‘화해사회’를 내세운다. 마오의 혁명론, 덩사오핑의 선부론(先富論)에 이은 세 번째 어젠다다. ‘화해사회’라는 말에는 중국의 문자답게 많은 중의적 의미가 녹아 있다. 먼저 한 지역이 잘살면 다른 지역도 잘살게 된다는 선부론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이는 지역과 계층, 민족 간의 격차를 가져왔다. 후진타오는 ‘화해사회’로 그런 문제를 연착륙시키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후진타오는 ‘농업, 농민, 농촌’이라는 3농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다수 인민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선부론의 바탕 위에서 이제 그 물을 메마른 땅에 뿌리겠다는 것. 물론 그 안에는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화해사회’라는 미소 뒤에는 ‘동북공정’과 ‘서남공정’으로 소수민족의 독립 명분을 제거하고,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있다. 흡사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꽃을 든 모습이다.
중국 지도부가 당면한 현실은 첩첩산중이다. 극심한 부의 격차와 계층의 분화, 도시와 농촌의 발전 격차 등은 체제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 때문에 중국이 모순에 빠지고, 내부 균열이 일어나 결국 붕괴하리라는 서방의 희망 어린 관측이 현실화하기에는 중국 지도부의 역량이 너무 노회하다. 중국이 몇 번의 홍역을 치르며 다시 세계의 강국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견해가 그래도 우세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책 ‘후진타오와 화해사회’(동아시아 펴냄)는 중국 지도부의 이러한 고민과 그들의 역량, 모순, 가능성을 두루 일별한다. 특히 지도부의 생각을 추상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나온 문건들을 정교하게 교직해 일정한 논거를 제시한다. 이 때문에 저자의 논지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알다시피 중국은 우리와 ‘순망치한’의 관계다. 심지어 글로벌 금융위기마저 중국이라는 우산을 통해 모면할 수 있었던 우리다. 굳이 수천 년의 역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중국을 더 잘 알아야 하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 중국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책이 문건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고,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특성상 다소 가독성이 떨어지는 점, 반복되는 사안이 많은 점은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