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 ‘베벌리힐스 주부’, acrylic on canvas, 183×366
1962년 영국 왕립미술학교를 졸업할 당시부터 ‘무서운 아이’로 불린 호크니는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캘리포니아로 이주합니다. 어둡고 칙칙한 영국 북부도시에서 살던 그에게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햇빛은 산소가 됐죠. LA에서 그는 머리를 금색으로 염색하고 새로운 예술가, 컬렉터, 비평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집을 자주 방문합니다. 이때 집집마다 갖춰진 수영장에 매료된 호크니는 자신의 동성애적 코드를 스스럼없이 드러낸 ‘수영장 시리즈’를 발표하며 미국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지요.
‘베벌리힐스 주부’ 역시 LA의 컬렉터인 베티 프리먼 집에 있는 수영장을 그리기 위해 붓을 들었다가 시작된 작품입니다. 예술가들을 초청해 콘서트를 여는 등 후원가로 활동한 프리먼의 집에서 호크니는 수영장뿐 아니라 LA 중상류층의 삶 자체에 매료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탄생했지요. 최신식 가구와 유행하는 미술품을 설치해놓은 모던한 디자인의 집. 이런 집은 남편이 돈을 버느라 부재중인 경우가 많아 보통 아내 혼자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컬렉션의 일부처럼 그림 한가운데 서 있는 프리먼의 얼굴 맞은편 벽을 보세요. 평생 그녀와 우정을 나눈 호크니는 이 자리에 머리만 남은 영양 박제를 의도적으로 그려 넣어 ‘고립된 여성’의 위치를 유머러스하게 드러냅니다.
눈여겨볼 점은 창문에 반사된 빛을 사선으로 처리한 부분인데요, 빗줄기 같은 하얀 선들은 3차원적 공간이라는 환영의 깊이를 없애며 이 작품을 물감을 칠한 평면의 캔버스로 환원시킵니다. 이것은 호크니가 당시 미국 미술의 지배적인 이론을 꿰뚫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모더니스트 비평가인 클레먼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이론으로 추상미술이 엄청난 지지를 받았죠. 평평한 캔버스의 2차원성과 물감, 이 두 가지가 회화를 회화로 만드는 기본 요소이므로 대상을 3차원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불순하다고 여기는 시각이었습니다. 이 짧은 사선들은 그린버그의 이론대로 회화의 평면성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인간이 가진 드라마의 요소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호크니의 독창적인 조형언어를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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