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들어 산다.
이는 필자가 쓴 ‘여름 낙조’란 시의 전반부다. 채석강(격포항)의 낙조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화도 간척지인 수지의 붕어와 그 일대 붕어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인용했다. 격포항의 내변산과 외변산의 경관, 그리고 싱싱한 횟집들은 널리 알려졌지만 이곳의 자치 넘는 붕어찜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백합 산지인 계화도 방죽의 뻘밭으로 가는 길가에 붕어찜으로 이름난 몇 집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곡가든(박정수, 063-582-4575)이다. 계화 방조제는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제1호 국토개발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10만평의 넓은 호수에는 월척이 넘는 떡붕어가 가히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만큼 많다. 그 때문인지 이곳은 통붕어 그대로에 갖은 양념을 하고 소스를 발라 쪄내는 찜 맛이 조림에 비할 바 아니다. 3~4 인분에 3만원 미만이고 보면 값도 싸고 실속이 있는지라 꾼들이 자주 찾는 집이다. 또한 끝없이 펼쳐진 뻘밭의 저녁노을도 뱃속을 뒤집는다. 마약과 같이 부푼 지독한 노을 속에는 미메스와 환상이 있다. 필자의 서재가 채석강 가에 있음도 이 시장기의 노을 때문이다.
붕어에게는 국적이 없다. 붕어는 세계의 모든 하천과 호수 그리고 저수지에 분포한다. 크기로는 동반포 서반포(두만강 지류)요, 맛으론 전주 덕진(德津)과 수원 서호(西湖)란 말도 있지만 청호지의 떡붕어야말로 가을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붕어의 미미도(美味度)는 서식하는 호수의 뻘흙이나 먹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까마득한 옛이야기다. 국토개발이 시작되기 전, 농약이 없던 시절에 붕어회는 별미였다. 해방 전만 해도 서호산 붕어회를 먹으려고 서울에서 수원까지 다녔다는 기록도 많고, 5cm 정도 쌀붕어를 초봄에 가늘게 회친 것이 감미였다고 회고하는 꾼도 많다. 또 덕진호의 붕어는 물이 약수(藥水)여서 약어(藥魚)라고도 불렀다. 청호지 붕어가 알려진 것도 그 옛날의 서호나 덕진호에 버금가는 영양이 풍부한 뻘흙 덕분에 맛좋은 대형 붕어가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취재한 바로는 우포늪의 목포나 사지포 등 천년의 늪은 바닥이 얕아 대형 붕어가 나오기 힘들다는 현지인들의 말도 귀담아들을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붕어 매운탕 감으로 알맞고 찜은 좋지 않다는 경험을 한 바 있다. 물론 지금도 붕어회를 한다는 간판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 늪 주위를 둘러보니 농약병이 떠다니고 축산가옥도 있어 안심할 수 없었다. 이는 청호지의 붕어도 마찬가지다. 오염되지 않은 호수나 하천이 이 국토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황달기가 있을 때 붕어를 놋양푼에 풀고 그것과 눈맞춤만 해도 눈이 맑아진다는 습속이 있을 만큼 붕어는 토종 물고기의 대명사다. 그러나 그런 습속 또한 옛말이고, 붕어를 상미(賞味)해 왔던 우리 민족의 심성도 잃은 지 오래다. ‘관서(關西) 의주부(義州府) 대동강변 붕어떡은 붕어요리 중 으뜸이었고, 관동 경흥부(慶興府) 적지산(赤池産) 붕어는 적색동안(赤色瞳眼)으로 신선한 맛에서 으뜸이었다’는 기록은 또 무엇인가. 그 빨간 눈알도 몸살을 앓는 이 공해 속에선 사팔뜨기나 되지 않았는지 안부가 궁금하다.
이는 필자가 쓴 ‘여름 낙조’란 시의 전반부다. 채석강(격포항)의 낙조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화도 간척지인 수지의 붕어와 그 일대 붕어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인용했다. 격포항의 내변산과 외변산의 경관, 그리고 싱싱한 횟집들은 널리 알려졌지만 이곳의 자치 넘는 붕어찜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백합 산지인 계화도 방죽의 뻘밭으로 가는 길가에 붕어찜으로 이름난 몇 집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곡가든(박정수, 063-582-4575)이다. 계화 방조제는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제1호 국토개발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10만평의 넓은 호수에는 월척이 넘는 떡붕어가 가히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만큼 많다. 그 때문인지 이곳은 통붕어 그대로에 갖은 양념을 하고 소스를 발라 쪄내는 찜 맛이 조림에 비할 바 아니다. 3~4 인분에 3만원 미만이고 보면 값도 싸고 실속이 있는지라 꾼들이 자주 찾는 집이다. 또한 끝없이 펼쳐진 뻘밭의 저녁노을도 뱃속을 뒤집는다. 마약과 같이 부푼 지독한 노을 속에는 미메스와 환상이 있다. 필자의 서재가 채석강 가에 있음도 이 시장기의 노을 때문이다.
붕어에게는 국적이 없다. 붕어는 세계의 모든 하천과 호수 그리고 저수지에 분포한다. 크기로는 동반포 서반포(두만강 지류)요, 맛으론 전주 덕진(德津)과 수원 서호(西湖)란 말도 있지만 청호지의 떡붕어야말로 가을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붕어의 미미도(美味度)는 서식하는 호수의 뻘흙이나 먹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까마득한 옛이야기다. 국토개발이 시작되기 전, 농약이 없던 시절에 붕어회는 별미였다. 해방 전만 해도 서호산 붕어회를 먹으려고 서울에서 수원까지 다녔다는 기록도 많고, 5cm 정도 쌀붕어를 초봄에 가늘게 회친 것이 감미였다고 회고하는 꾼도 많다. 또 덕진호의 붕어는 물이 약수(藥水)여서 약어(藥魚)라고도 불렀다. 청호지 붕어가 알려진 것도 그 옛날의 서호나 덕진호에 버금가는 영양이 풍부한 뻘흙 덕분에 맛좋은 대형 붕어가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취재한 바로는 우포늪의 목포나 사지포 등 천년의 늪은 바닥이 얕아 대형 붕어가 나오기 힘들다는 현지인들의 말도 귀담아들을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붕어 매운탕 감으로 알맞고 찜은 좋지 않다는 경험을 한 바 있다. 물론 지금도 붕어회를 한다는 간판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 늪 주위를 둘러보니 농약병이 떠다니고 축산가옥도 있어 안심할 수 없었다. 이는 청호지의 붕어도 마찬가지다. 오염되지 않은 호수나 하천이 이 국토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황달기가 있을 때 붕어를 놋양푼에 풀고 그것과 눈맞춤만 해도 눈이 맑아진다는 습속이 있을 만큼 붕어는 토종 물고기의 대명사다. 그러나 그런 습속 또한 옛말이고, 붕어를 상미(賞味)해 왔던 우리 민족의 심성도 잃은 지 오래다. ‘관서(關西) 의주부(義州府) 대동강변 붕어떡은 붕어요리 중 으뜸이었고, 관동 경흥부(慶興府) 적지산(赤池産) 붕어는 적색동안(赤色瞳眼)으로 신선한 맛에서 으뜸이었다’는 기록은 또 무엇인가. 그 빨간 눈알도 몸살을 앓는 이 공해 속에선 사팔뜨기나 되지 않았는지 안부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