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은 체질개선의 압박을 받고 있다. 회원사를 늘리려면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망은 두텁지만 사세가 크지 않은 김회장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다. 그의 리더십은 당장 차기 회장단 회의 출석률에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희수(喜壽)를 코앞에 둔 나이지만 유머감각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평생을 원칙과 상식을 따랐지만 전경련 회장단 중 유머감각이 발군이다.”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이 전하는 김각중(金珏中·75) 신임회장의 이면이다. 나이에 비해 술도 화통하게 잘한다고 한다.
재벌체제의 구각(舊殼)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치는 전경련 회장단. 김회장은 현 회장단 중 최고 연장자이지만 후배 회장들이 쉽게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다재다능한 면모를 자랑해 왔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 유학을 떠나 동년배 중엔 보기 드물게 미 박사학위(화학)를 가지고 있다.
유학시절 국외송금이 어려웠기 때문에 시간당 75센트를 벌기 위해 세탁소 청소부, 접시닦기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김회장의 모친 김점효(金占效)씨의 큰오빠가 인촌 김성수(金性洙)선생. 당대 최고 가문이 배출한 2세 경영인의 유학생활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초라했다.
고된 유학시절 덕택에 김회장은 일어,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까지 통달했다. 99년 10월 전경련이 개최한 ‘서울경제포럼’에 헨리 키신저, 리콴유 등 당대의 VIP들을 접대한 사람이 김회장이었다. 김우중회장의 전경련 회장직 사퇴로 “누가 외빈들을 맞이하나”고 우려했던 전경련 기자단은 김각중회장의 세련된 매너와 유창한 영어실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유학이 늦었던 만큼 경영입문도 늦었다. 귀국후 고려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67년 마흔살이 넘어 대한화섬(이후 태광산업에 흡수) 상무 겸 공장장으로 경영일선에 나섰다. 그것도 대학강단과 기업을 오가는 반쪽 경영인으로.
부친이 경영하는 경방에 들어간 것은 경방 창립 50주년인 69년이었다. 대학을 마치기 무섭게 후계수업을 받는 요즘 2세들보다 출발이 한참 늦었던 셈이다.
김회장의 경영철학은 원칙과 상식이다. 전경련 회장단 회의 석상에서나 사무국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 철학을 주문한다. 상식과 원칙을 벗어날 때 경영에도 무리가 찾아온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원칙적인 면모 덕택에 재계 원로들 사이에서도 김회장의 신망은 두텁다.
김회장이 2월 중순 전경련의 26대 회장으로 공식 추대된 것은 그동안 개인적으로 쌓아올린 이같은 신망과 재계에 대한 본인의 남다른 애정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회장 부친 김용완씨도 60, 70년대 6차례에 걸쳐 전경련 회장을 지냈다. 누구도 맡지 않으려는 전경련 회장직을 정부와의 관계도 원만한 김회장이 맡음으로써 정부와의 관계복원과 사분오열된 재계의 융합,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회장단의 포석이 엿보인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대행’ 꼬리표를 떼어낸 김회장을 아직도 ‘대타’ (代打)로 보는 기류가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전경련의 회장 ‘구인난’은 정부 관료들이 부추긴 면이 크다. 하지만 4대그룹 구조조정본부 고위관계자들은 일찌감치 ‘우리 회장님은 전경련 회장직에 오르지 않는 게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도 사실이다. 정부개혁 공세와 재계의 ‘접점’에 있는 한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정부의 개혁압력은 물론 재계 내부적으로도 체질개선의 압박을 받고 있다. 4대재벌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회원사를 늘리려면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망은 두텁지만 사세가 크지 않은 김회장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다. 그의 리더십은 당장 차기 회장단 회의 출석률에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희수(喜壽)를 코앞에 둔 나이지만 유머감각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평생을 원칙과 상식을 따랐지만 전경련 회장단 중 유머감각이 발군이다.”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이 전하는 김각중(金珏中·75) 신임회장의 이면이다. 나이에 비해 술도 화통하게 잘한다고 한다.
재벌체제의 구각(舊殼)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치는 전경련 회장단. 김회장은 현 회장단 중 최고 연장자이지만 후배 회장들이 쉽게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다재다능한 면모를 자랑해 왔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 유학을 떠나 동년배 중엔 보기 드물게 미 박사학위(화학)를 가지고 있다.
유학시절 국외송금이 어려웠기 때문에 시간당 75센트를 벌기 위해 세탁소 청소부, 접시닦기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김회장의 모친 김점효(金占效)씨의 큰오빠가 인촌 김성수(金性洙)선생. 당대 최고 가문이 배출한 2세 경영인의 유학생활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초라했다.
고된 유학시절 덕택에 김회장은 일어, 영어는 물론 프랑스어까지 통달했다. 99년 10월 전경련이 개최한 ‘서울경제포럼’에 헨리 키신저, 리콴유 등 당대의 VIP들을 접대한 사람이 김회장이었다. 김우중회장의 전경련 회장직 사퇴로 “누가 외빈들을 맞이하나”고 우려했던 전경련 기자단은 김각중회장의 세련된 매너와 유창한 영어실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유학이 늦었던 만큼 경영입문도 늦었다. 귀국후 고려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67년 마흔살이 넘어 대한화섬(이후 태광산업에 흡수) 상무 겸 공장장으로 경영일선에 나섰다. 그것도 대학강단과 기업을 오가는 반쪽 경영인으로.
부친이 경영하는 경방에 들어간 것은 경방 창립 50주년인 69년이었다. 대학을 마치기 무섭게 후계수업을 받는 요즘 2세들보다 출발이 한참 늦었던 셈이다.
김회장의 경영철학은 원칙과 상식이다. 전경련 회장단 회의 석상에서나 사무국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 철학을 주문한다. 상식과 원칙을 벗어날 때 경영에도 무리가 찾아온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원칙적인 면모 덕택에 재계 원로들 사이에서도 김회장의 신망은 두텁다.
김회장이 2월 중순 전경련의 26대 회장으로 공식 추대된 것은 그동안 개인적으로 쌓아올린 이같은 신망과 재계에 대한 본인의 남다른 애정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김회장 부친 김용완씨도 60, 70년대 6차례에 걸쳐 전경련 회장을 지냈다. 누구도 맡지 않으려는 전경련 회장직을 정부와의 관계도 원만한 김회장이 맡음으로써 정부와의 관계복원과 사분오열된 재계의 융합,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회장단의 포석이 엿보인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대행’ 꼬리표를 떼어낸 김회장을 아직도 ‘대타’ (代打)로 보는 기류가 더 강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전경련의 회장 ‘구인난’은 정부 관료들이 부추긴 면이 크다. 하지만 4대그룹 구조조정본부 고위관계자들은 일찌감치 ‘우리 회장님은 전경련 회장직에 오르지 않는 게 좋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도 사실이다. 정부개혁 공세와 재계의 ‘접점’에 있는 한 좋은 평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정부의 개혁압력은 물론 재계 내부적으로도 체질개선의 압박을 받고 있다. 4대재벌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회원사를 늘리려면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망은 두텁지만 사세가 크지 않은 김회장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 같다. 그의 리더십은 당장 차기 회장단 회의 출석률에서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