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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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영혼 불어넣은 예산 사과 증류주 ‘추사’

[명욱의 위스키 도슨트] 지역 농산물에 인문학 담아 절주 트렌드에도 완판

  •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입력2026-03-11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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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추사 40’(오른쪽)과 다양한 한정판 제품들.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 제공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추사 40’(오른쪽)과 다양한 한정판 제품들.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 제공 

    최근 주류 트렌드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MZ세대의 절주다. 강압적인 회식 문화가 사라진 것은 물론, 젊은 층 사이에서 알코올 섭취 자체를 멀리하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 불필요한 음주를 줄이는 라이프 스타일)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에 따른 불확실성 증가와 물가상승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이 청년을 ‘갓생’(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부지런하며, 모범적인 삶을 이르는 말)을 사는 데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위스키 판매도 주춤한 요즘, 내놓자마자 ‘완판’되는 술이 있다. 충남 예산 사과로 만든 증류주 ‘추사(CHUSA)’다. 여기엔 농업회사법인 예산사과와인㈜의 농업과 로컬 사회, 예술에 대한 진심이 담겨 있다.

    와이너리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예산은 충남 지역 사과 생산량 1위를 차지하는 곳이다. 정제민 예산사과와인 대표는 캐나다 이민 시절 경험한 와이너리 운영 노하우를 고향 사과에 접목하기로 결심했다. 사과를 재배해 판매하는 1차 산업에서 벗어나 술을 빚는 2차 산업, 그리고 체험과 관광을 결합한 3차 산업을 융합한 이른바 ‘6차 산업’ 모델을 15년 넘게 지속해왔다.

    이곳 와이너리는 술 공장을 넘어 봄에는 사과꽃이 만개한 풍경이 펼쳐지고, 가을에는 사과 따기 체험과 축제가 열리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특히 지하 숙성고에서 오크통에 담긴 증류주를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다. ‘맛없고, 의미 없는 술을 거부’하는 MZ세대에게 예산사과와인은 이야기와 참여의 가치를 제공한다. 

    예산사과와인의 대표 브랜드인 ‘추사’는 지역의 인문학적 자산을 브랜드 핵심 자산으로 승화했다. 예산 출신인 조선 후기 실학자 추사 김정희의 호를 제품명으로 정하고, 그의 걸작인 ‘불이선란도’와 ‘세한도’를 라벨 디자인에 적용했다. 술 한 병을 단순 기호식품이 아닌,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를 거뒀다.



    스토리텔링 또한 치밀하다. 땅, 하늘, 바람, 날씨라는 농업적 요소에 미생물 발효와 시간 숙성이라는 가치를 더해 브랜드 철학을 구축했다. 또한 자사 제품을 프랑스 사과 증류주 ‘칼바도스(Calvados)’나 캐나다 ‘아이스 와인’과 비교 설명함으로써 소비자에게 새로운 지식적 경험을 제공한다. 소비자는 술을 마시는 동시에 지역 역사와 글로벌 주류 트렌드를 학습하는 지적인 만족감을 얻는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예산사과와인은 투 트랙 마케팅으로 프리미엄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았다.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추사 40’과 한정판 제품인 ‘추사 50’은 위스키 등 해외 증류주 애호가를 타깃으로 한다. 무감미료 원칙과 오크통 숙성을 통한 깊은 풍미(초콜릿, 바닐라 향)는 브랜드 권위를 세우고 견고한 팬덤을 형성했다.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저렴한 ‘추사백’(25도, 40도) 시리즈는 스테인리스 숙성을 통해 깔끔한 맛을 강조하며 일반 소비자층의 접근성을 높였다. 깔끔한 감압증류로 좀 더 대중적이고 접근성 좋은 맛을 추구한다. 추사는 세법상 전통주로 분류되지만 사과를 발효시켜 증류하는 방식은 브랜디에 가깝다.

    최근 추사는 주류 플랫폼 데일리샷, 대동여주도 등과의 협업에서 출시와 동시에 완판되는 기록을 세웠다. 더불어 최근에는 와이너리에서 직접 재배한 특정 품종 사과로만 소량 생산하는 한정품을 추가해 “지금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희소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위스키 전문 매체와 유튜브 채널 생명의물, 주락이월드 등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자 전통주에 익숙하지 않은 증류주 마니아도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수덕사 산채 음식과의 미식 페어링

    많은 관광객이 예산을 찾는 이유는 와이너리 하나만이 아니다.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덕사는 방문객에게 고즈넉한 휴식과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이곳 대웅전은 국보 제49호로 지정돼 있다. 와이너리에서 술 역사를 배우고 수덕사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코스는 현대인에게 완벽한 힐링을 선사한다. 또한 국내 최대 규모 저수지인 예당저수지는 시원한 풍광과 출렁다리로 시각적 즐거움을 더한다.

    예산 명물인 고덕갈비나 수덕사의 정갈한 산채 음식과의 미식 페어링은 여행에 방점을 찍는다. 예산사과와인은 로컬 맛집들과의 연계를 통해 예산에 가야만 맛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도 설계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술을 파는 행위를 넘어 지역 경제와 상생하는 로컬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다. 인근에 자리한 평택 험프리스 주한미군에 단골이 많다고 한다.

    MZ세대가 술 소비를 줄인다고 해도 결국 살아남는 것은 추억과 의미가 있는, 확고한 철학을 가진 술이다. 소비자는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 아닌, 자신의 가치관을 표현할 수 있는 ‘똘똘한 한 병’을 찾는다. 이는 수많은 선택지에서도 예산사과와인의 ‘추사’가 완판 행렬을 이어가는 이유다. 지역 농산물에 역사적 영혼을 불어넣은 예산사과와인 사례는 지방 소멸 시대에 로컬 브랜드가 어떻게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똘똘한 브랜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간이 숙성시킨 예산의 사과 향이 전 세계인 식탁으로 번져나갈 날이 머지않았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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