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3년 7월, 전북 부안군에서는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부안군수의 핵폐기장 유치 신청으로 촉발된 갈등은 폭력사태로 얼룩졌다. 시위 과정에 부상자와 구속자가 속출하면서 갈등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2003년 10월 3일 고건 당시 국무총리와 부안 대책위가 대화기구 설립에 합의하고 협상을 진행했지만 실질적 효과는 없었다. 2003년 이내에 주민투표를 실시하자는 대책위 주장에 정부가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대화는 중단됐다. 이후 ‘부안 핵폐기장 주민투표 중재단’이 구성됐고, 정부와 주민의 입장을 중재한 끝에 2004년 초 주민투표 실시가 결정됐다. 2004년 2월 14일 실시된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건립에 대한 부안군민 찬반 투표에서 주민 91%가 반대표를 던져 부안핵폐기장 건립은 사실상 없던 일이 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에서)
부안핵폐기장반대운동은 문재인 대통령이 2003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으로 재임하던 때 발생한 대표적 사회 갈등 가운데 하나다. 부안 사태는 7개월간 사회적 대가를 톡톡히 치른 뒤에야 일단락됐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사용후핵연료에 대한 관리 방안을 마련코자 공론화위원회(공론화위)를 설립, 운영했다. 1년 8개월간 활동한 공론화위는 2015년 6월 최종권고안을 정부에 제출했고, 박근혜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5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고준위방사성폐기물(고준위폐기물)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절차와 방식 등을 담고 있다. 가장 민감한 대지 선정 문제에 대해서는 2028년까지 단계적으로 실행해나간다는 원론적 내용만 들어 있다. 중·저준위폐기물 대지 선정 때보다 더욱 거센 반발이 예상되는 고준위폐기물 대지 선정 작업은 아직 시작도 안 한 셈이다.
6월 19일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문 대통령이 ‘탈원전’ 등 에너지 정책 방향을 천명한 뒤 탈원전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이행해야 한다는 찬성 여론이 적잖다. 하지만 성급한 탈원전 결정이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야기할 수 있다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서울신문’이 여론조사 전문기관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7월 13~15일 실시한 조사 결과 원전 건설 중단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45.1%, ‘반대한다’는 의견은 40.2%로 드러났다. 젊고 진보 성향일수록 찬성률이 높았고, 50대 이상 보수 성향에서 반대가 많았다(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탈원전’으로 무력화된 전력수급기본계획
정부가 2015년 7월 발표한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기본 방향에는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가 포함됐다. 석탄 비중을 최소화하고 신규 전력설비물량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 2개 및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함으로써 온실가스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그러나 이 같은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으로 전면 수정될 운명에 처했다.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 출신 한 인사는 “에너지 수급 정책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산자부 산하 국가에너지위원회에서 검토한 뒤 산자부에 먼저 보고하고, 그 내용을 국회에 보고해 국무회의에서 최종 결정한다”고 말했다.
과거 정부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탈원전 주장은 팩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기보다 ‘핵은 적폐’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주무장관인 산자부 장관이 사실상 공석인 상황에서 대통령이 ‘탈원전’을 선언한 것이 적절했는지 의문”이라며 “탈핵도 좋고, 탈원전도 좋은데 너무 서두르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 반대 측에서 쏟아내는 여러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아직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 때 대만의 탈원전을 예로 들면서 원전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막상 대만은 6월 9일 제2원전 1호기, 사흘 뒤 제3원전 2호기를 재가동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대만전력공사가 여름철 전력 수요 급증에 대비해 두 원전의 재가동이 불가피하다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이 밖에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대로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20% 목표를 달성하려면 부산 1.15배 크기의 태양광설비와 서울 여의도 약 20배 면적의 풍력발전기를 설치해야 하는 점,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이 중단되고 전면 탈핵으로 가면 최대 30만 명의 일자리가 없어져 일자리 대통령의 이미지가 무색해진다는 점, 독자적 모델로 원전 수출이 가능한 5개국 가운데 하나인 우리나라가 이를 포기하는 것은 국익에 손해라는 점 등 반대론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필렬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언론 기고를 통해 “원자력발전과 사용후핵연료 처리는 외교·안보나 경제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라며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원자력발전을 폐기하자는 시민사회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인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양한 이해 당사자를 참여시켜 협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 수립한 에너지 수급 정책이 성공적으로 정착해야만 풀린다”고 조언했다.
7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 대통령 초청 여야 대표 오찬회동에서도 대통령의 탈원전 정책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문 대통령은 “신고리원전 5, 6호기 건설 전면 중단 공약을 밀어붙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 공론조사라는 민주적 절차를 따르겠다고 한 것”이라며 “찬반양론이 있을 텐데 생산적이고 건강한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에 이르도록 하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석 달 동안 공론조사에서 원전 정책의 골간이 충분히 합의되기는 어려우리라는 전망이 많다. 원전 건설 공사를 책임지는 한국수력원자력 측은 “‘영구 중단’을 막을 수 있도록 원전의 필요성을 충분히 공론화위에 제시하겠다”는 입장이다.
탈원전 문제 외에도 대통령 취임 후 두 달 동안 문 대통령이 앞장서 제시한 국정 어젠다로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와 최저임금 1만 원 달성 등이 있다. 그러나 탈원전만큼이나 두 사안도 거센 논란에 휩싸여 있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대표는 “지금은 지지율이 높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탈원전, 정규직 전환, 최저임금 인상 등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대형 이슈가 많아지면 시간이 갈수록 국정운영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