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지난해 5월 개최한 스펙 초월 채용설명회. 일부 대기업은 올해 상반기 채용에서 스펙을 초월해 인재를 뽑을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다.
취업 불합격 문자메시지를 받은 청년이 씁쓸한 표정으로 귀가하고, 힘내라는 부모의 응원 쪽지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2월 ‘어느 취준생의 지친 하루’라는 제목으로 인터넷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 공개된 뮤직비디오 한 편이 온라인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넷 취업포털 인크루트에서 계속되는 낙방에 좌절한 취업준비생을 주인공으로 만든 이 뮤직비디오는 유튜브 공개 3주 만에 200만 조회 수를 넘겼고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내용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대학 입학은 취업준비의 시작
대학생의 취업난이 개인 문제가 아닌 국가 차원의 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통계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15~29세) 실업률은 갈수록 증가해 1월 9.2%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채용에 나서는 기업은 한정된 반면, 졸업생은 매년 쏟아지면서 청년실업자가 계속 늘어나는 현실이 수치에 고스란히 반영된 셈. 통계청이 집계한 청년층 공식실업자 수는 39만5000명인데 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졸업예정자와 휴학생 등을 포함하면 청년층 체감실업자 수는 107만1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갈수록 취업경쟁은 치열해지고 대학생들이 스펙을 쌓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비용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사회 곳곳에서 쏟아지자 삼성그룹, 현대자동차, LG그룹 등 일부 대기업은 올해 채용부터 불필요한 스펙은 보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24쪽 참조). 반색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취업준비생들은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보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3월 9일 서울대에서 열린 현대자동차 채용설명회를 찾아갔다. 강의실 내 150석은 설명회 시작 전 꽉 찼고 늦게 도착한 학생들은 계단에 앉거나 서서 들어야 했다.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서울대 경영학과 3학년 남학생은 “당장 입사지원서를 낼 수 있는 졸업예정자는 아니지만 미리 정보를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참석했다. 평소 입사하고 싶었던 기업에서 어떤 사람을 뽑으려 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인재채용팀 관계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학생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부문별로 몇 명을 뽑는지, 자기소개서가 부서 배치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학점은 얼마나 반영되는지 등 사소한 질문부터 ‘SSKK(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라는 대로) 조직문화로 유명한데 그런 사람을 원하는가’라는 기업의 특성을 간파한 질문까지 다양했다. 채용담당관이 일일이 답변했지만 손을 드는 학생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인터넷 취업포털 인크루트에서 제작한 뮤직비디오 ‘어느 취준생의 지친 하루’는 인터넷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 공개되자마자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취업난은 소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같은 명문대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 여파로 지방대 학생들은 과거에 비해 더욱 좁아진 취업문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인천 소재 사립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 금융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취업준비생 김인수(27·가명) 씨는 “재학 중 인턴까지 합하면 이번이 세 번째다. 한 곳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쉽지 않다. 일단 인턴이라도 계속 하고 있는데 과연 정규직 취업에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며 불안한 앞날을 걱정했다.
각 대학 취업준비생이 처한 살벌한 현실은 재학생에게도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 때문에 대학가 풍경은 과거와 사뭇 달려졌다. 최근 1학년 때부터 취업준비에 나서는 학생이 늘어난 것. 취미로 할 수 있는 동아리를 찾는 신입생보다 공모전, 취업, 경영학술 관련 동아리의 문을 두드리는 신입생이 늘었다.
서강대 국문과 14학번 김선희(22·가명) 씨는 “입학 직후부터 학교에서 열린 취업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저학년 때는 취업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지 많은 정보를 얻었다. 수강신청도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강의를 빼놓지 않고 듣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찌감치 언론계로 진로를 결정하고 교외 기자단, 교내 영화평론단 등 이력서에 써넣을 수 있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외국어를 무기로 삼고자 영어와 프랑스어 공부를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취업과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있을 때 실력을 쌓고 싶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14학번 최세영(21·가명) 씨도 지난해부터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입학했을 때부터 원하는 직업군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데 집중했다. 1학년 1학기 때는 길이 좁혀지지 않았는데 2학기가 되면서 컨벤션 기획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며 취업에 대한 명확한 뜻을 밝혔다. 최씨는 관련 직업을 체험하기 위해 상당 시간을 투자한 상태였다. 그는 “지난해 코엑스 4개 홀을 통째로 빌려 진행된 대규모 행사에서 진행 관련 업무를 했다. 준비 기간이 길었지만 행사 기간 부실한 부분이 많이 노출됐는데 그런 것들을 리포트로 정리해뒀다. 앞으로도 이런 경험들을 기록해 취업할 때 활용할 계획”이라며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중이라고 밝혔다.
취업문이 갈수록 좁아지면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취업준비에 나서는 학생이 늘고 있다. 사진은 3월 2일 열린 고려대 신입생 입학식.
재학 중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 남학생은 이 시기를 취업과 연계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번 학기에 복학한 성균관대 경영학과 12학번 김남수(25·가명) 씨는 “취업을 위해 1학년 때부터 영어는 일찌감치 준비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투사를 지원했고 회화 위주의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기업 입사를 준비 중이라는 김씨는 “스펙을 다양하게 쌓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영어 공부에 들어가는 시간을 절약했기에 부담이 적은 편”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지난가을 복학한 서강대 경영학과 11학번 지성혁(24·가명) 씨는 군 복무를 하던 중 진로를 결정했다. 그는 “군 입대 기간에 진로를 고민하고자 개인 시간이 많은 의경(의무경찰)에 지원했다. 관광경찰로 보직을 받으면서 외국인 안내 업무를 주로 했고 언론과 인터뷰를 할 일이 잦았다. 원래 기자나 PD직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의경으로 복무하던 중 언론사에 취업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고 설명했다. 지씨는 또 “부대 안에 나처럼 진로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가진 동기가 많았다”며 “일이 끝나면 취업 관련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CPA(공인회계사), 행정고시 등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신입생 때부터 취업준비에 나서는 풍토가 확산하면서 대학도 지원에 나서는 경우가 늘었다. 숙명여대는 교내 외국어 교육기관인 국제언어교육원을 통해 신입생을 대상으로 공인어학시험 준비 프로그램 SFEC(Sookmyung Freshmen TOEIC/ TOEFL English Club)를 운영하고 있다. 국제언어교육원 측은 이에 대해 “1학년 신입생 시기를 활용해 조기에 영어 능력을 향상시켜 사회에 진출할 때 반드시 필요한 공인어학 성적을 획득하게 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취업준비생이 진로 결정에 소모하는 시간을 줄이도록 신입생 때부터 로드맵을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대학도 있다. 국민대는 올해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취업에 성공하기까지 자신만의 계획을 짤 수 있게 한 ‘진로수첩’을 나눠줬다. 수첩에는 분야별 채용정보와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의 조언이 적혀 있다. 국민대는 차후 관련 수첩을 잘 활용한 사례를 뽑는 공모전을 진행하고, 열정콘서트를 열어 자신의 진로를 작성한 원고를 심사해 발표하는 장도 마련할 계획이다.
이를 기획한 인영실 국민대 경력개발센터 부장은 “얼마 전 신입생 3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오리엔테이션에서 하루 800명씩 4회에 걸쳐 진로교육을 했다. 입시 경쟁을 뚫고 힘겹게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의 귀에 취업 이야기가 들어갈 리 만무하지만, 4학년이 됐을 때 시간을 허비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며 “학생들이 효율적으로 취업을 준비하려면 대학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중에 덜어내더라도 이력서 꽉 채워야
3월 9일 서울대에서 열린 현대자동차 채용설명회에 학생 200여 명이 참석해 채용 관련 정보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각 대학 경력개발센터와 연계해 취업 정보를 제공하는 ‘동아일보’ 청년드림센터의 안소영 과장은 대학생의 취업준비 시점이 빨라진 것에 대해 “졸업예정자의 스펙 쌓기 광풍이 이를 지켜보는 저학년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기업들이 스펙을 초월해 혁신적인 채용 과정을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내놨지만 ‘나중에 덜어낼지언정 이력서를 채울 스펙은 가능한 한 많아야 한다’는 인식은 취업준비생을 비롯해 저학년들에게까지 확산돼 있다고.
안 과장은 “대학 입학을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상장 타기에 몰입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취업 관문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일반적 스펙인 인턴, 공모전, 봉사 활동, 대외 활동 등은 시간이 많은 1, 2학년 때 준비해놓아야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일반적인 스펙보다 특별한 경험을 하려는 학생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취업준비에 무작정 빨리 뛰어드는 것이 취업 성공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안 과장은 “이것저것 많이 준비하기보다 한 길을 꾸준히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가 가고 싶은 분야를 파고들어 무엇을 배웠는지 기록하고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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