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순 사건’ 현장 검증에서 범인이 범행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도움을 청하러 경찰서를 찾은 모녀는 다시 한 번 문전박대를 당한다. 경찰이 “성폭행 사건을 신고하려면 진단서가 필요하다”며 제3의 병원을 추천한 것이다. 해당 병원에서는 “경찰과 함께 경찰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라”며 이들을 되돌려 보낸다. 결국 엄마는 사흘에 걸쳐 여러 병원과 경찰서를 전전한 뒤에야 비로소 딸이 성폭행당했다는 진단서를 받고, 사건을 신고할 수 있었다. 성폭력 사건에 관여하면 성가신 일이 생긴다고 여기던 당시 사회 풍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 사연이 언론에 보도된 뒤 시민사회가 들끓었다. 성폭행 피해 어린이가 어려움 없이 진료와 수사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따라 이듬해 13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종합지원센터 ‘해바라기 아동센터’가 문을 열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의 성폭력 피해 어린이는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을까. 나영이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최근 우리나라의 성폭력 피해 아동 지원 정책이 후퇴한 듯 보인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가 지적한 것은 ‘해바라기 아동센터’의 위상과 성격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4년 서울 마포에 문을 연 1호 ‘해바라기 아동센터’는 성폭력 피해 어린이가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돕고, 부모 및 보호자의 정신건강도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2005년 대구와 광주, 2008년 경기, 2009년 부산, 인천, 강원, 충청, 전북, 경남 등에 차례로 개관할 때도 대상과 목적은 동일했다.
해바라기 아동센터 위상 변화
그러나 2010년부터 여성가족부는 ‘해바라기 아동센터’와 성인 피해자 지원 기관인 ‘원스톱 센터’를 통합해 ‘해바라기여성아동센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원스톱 센터’의 지원 대상은 성폭력·가정폭력 및 성매매 피해자 등이다. 이에 대해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은 “같은 폭력 피해자라 해도 어린이와 성인은 특징이 전혀 다르다. 성폭력 피해 아동에 대한 지원은 좀 더 전문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현재 정부는 이 문제를 행정편의적 시각으로만 접근한다”고 비판했다.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가 마음 편히 찾아갈 의료기관이 여전히 적다는 점도 문제다. 나영이 아버지는 “우리나라에 성폭력 피해 어린이의 심리를 치료할 수 있는 의료기관과 전문가가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그에 따르면 나영이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 사건 후 서울 해바라기 아동센터에서 만난 임상심리전문가 최지영 씨에게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부쩍 밝아지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진 것. 그러나 2011년 최씨가 다른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새 병원은 수도권에 사는 나영이가 정기적으로 다니기엔 너무 멀었고, 집 근처에는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나영이 아버지는 “아이가 중학교에 간 뒤부터 조퇴를 하려 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왜 수업을 빠지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어 싫다고 하더라. 그런데 집 근처에 병원이 없으니 도리가 없지 않나”라며 “최근 한동안은 아예 심리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10월 초 아이가 우울증 진단을 받은 뒤 아버지의 최대 관심사는 적당한 병원을 찾는 것이다. 그는 “신의진 의원과 ‘경찰언니’까지 나서서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전문가들은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성인 피해자에 비해 오랜 기간 전문적인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사춘기 무렵에는 반드시 추가적인 치료를 통해 우울 및 혼란, 분노 등을 다스려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영이 아버지는 “우리 아이 사건은 큰 이슈가 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른 사건 피해자 가족은 훨씬 많은 어려움에 시달릴 것”이라며 “이들의 육체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전문적이고 장기적인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